눈보다 더 희게
눈보다 더 희게

폴 트립 | 조계광 역 | 생명의말씀사 | 254쪽 | 14,000원

목욕탕에 가본 지 오래되기도 했지만, 지인들과 함께 목욕탕에 간지는 더욱 오래되었다.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 한 목욕탕에 가면 서로 등을 맡기고 때를 밀어주지만, 나는 남에게 등을 맡기는 것이 매번 부담스럽고 창피했다. 매일 샤워해서 별로 나올 때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때가 많이 밀리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 내겐 항상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중학교 땐가는 한동안 결벽증이 있어서, 손씻기를 과도하게 했었던 적도 있었다. 아마 내 수치나 부끄러움, 약점 등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면 내시경을 한 적이 없다. 마취가 깨어나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겉보기와 달리, 아마 내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게다.

사실 지금의 시대는 SNS의 발달로 현재의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의 행적도 완벽하게 숨기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자신의 잘못된 행적으로 현재의 성취를 잃어버리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또 페미니즘과 미투의 바람으로, 현재만이 아니라 이전의 실수나 죄가 드러나 몰락하고 마는 이들도 꽤나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영역에서는 과거에는 죄이고 수치스러웠던 일들이 지금은 죄도 아니고 별것 아닌 것이나 개인의 취향과 선택으로 여겨지는 현상도 우리 주위에 있어 혼란스러운 것도 있다.

그런 세상의 이중성과 불균형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죄는 시대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고 윤리 또한 문화의 변화 속에서 그 기준도 달라지는 것일까?

그렇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용인된다 해서 그것이 교회나 성도들에게도 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죄를 죄라 아니해도,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죄일 것이다.

문제는 그 잣대를 남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일차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고 기준이시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준이 뒤바뀌면, 다른 이를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죄에 대해 관대했던 이들이 자신의 죄가 드러나 똑같은 잣대로 지탄받는 역전이 일어날 수 있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았던 자이다. 그렇지만 그런 다윗도 밧세바 사건으로 일생 최대의 오점과 상흔을 남기고 만다.

그 흑역사와 치유를 담은 시가 바로 시편 51편이다. 이 51편을 <경외>, <고난> 등의 저자 폴 트립이 묵상하여 나눈 책이 ‘눈보다 더 희게’이다.

밧세바 사건이나 죄에 대한 책을 쓴 저자는 꽤 된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접할 때마다,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그 죄에 대한 분석과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세밀히 적용하고 살피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음을 느낀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지만 그 시각은 대게 추상적이고 피상적일 때가 많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국가나 교회를 위한 범교단적 회개 기도회를 자주 본다. 그렇지만 그런 기도회에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교회나 목회자가 적잖이 있음을 우리는 보곤 한다.

하지만 그런 기도회가 있었다고 그 교회나 목회자가 달라짐을 본 경우는 전혀 없다시피하다. 세습 문제를 고치고, 스캔들이나 이슈를 해결했다는 이야기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죄에 대한 직면이 없기 때문이며,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잊기 때문이다. 결국 그 죄의 정의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정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설혹 그것이 같다 할지라도, 그 죄에 대한 해결에 자신의 죄는 제외하거나 셀프 사면을 내리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의 죄를 죄가 아니라 그냥 해결해야 될 문제,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기도
▲ⓒBen White
그러나 죄는 하나님이 기준이시며, 그 죄의 영역은 내가 제한하여 택하는 것도 아니고, 내 죄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할 수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폴 트립은 이 책에서 시편 51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에 대해 직면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 죄를 직면해야 씻음과 회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책 중 청교도 목회자인 존 오웬의 <죄와 유혹>은 우리가 짓는 죄의 심각성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그 정도는 아닐지 모른다(아마도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영적으로 그 당시보다 심히 무뎌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다시 말하지만, 심판자로서 자기 자신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 저자들은 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벌어지는 죄임을 강조하곤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다른 이들 앞에서는 어느 정도 장당화하고 합리화할 수 있다.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것이 저 사람들이나 세상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자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설혹 내 문제가(?) 크고 비록 다른 사람들은 나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부분에서 나보다 상대적으로 심각한 죄를 범한다고 변명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고 피할 곳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수치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거기서 멈춘다면 우리는 망하는 것이고, 영적 파산 상태로 끝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밝히시지만 그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한 처벌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해결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면서도 소망이 있다.

우리가 죄를 감추고 또 그것을 변명하여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진정한 해결은 결국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남에게 등을 맡기기가 부끄럽고 수면 내시경을 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골방에서 하나님께 발가벗은 모습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그 외에는 소망이 없기에….

문양호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