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작은 배 구름 조용 불안 흔들 폭풍우 초조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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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후서 3장 1-7절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삶에 시작점을 찍었다면, 그 다음 찍어야 할 것은 마침표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면 시작은 물거품이 된다. 즉 시작하면 반드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마침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마무리다. 또 하나는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다. 마침표란 어떤 일의 끝마침과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음을 뜻한다. 마무리했으면, 더 보탤 것이 없어야 한다.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것이 진짜 마침표다.

‘이별’에는 마침표가 찍혀야 한다. 하지만 정철은 그의 책 《불법사전》에서 ‘이별’에는 마침표를 찍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별에는 마침표가 아니라 도돌이표가 찍힌다고 이야기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의 가슴에 느낌표를 찍고, 서로의 품에서 쉼표를 찍다가, 어느 날 서로에게 물음표를 던진 후, 한동안 조용히 말없음표를 찍고, 결국 서로의 기억에 마침표를 찍는 것,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은 자꾸 되돌이표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이별이다.”

이별했는데 되돌이표를 만지작거린다. 이는 이별이 아니가.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데 찢지 못하는 것이 이별이라고 한다.

이별은 마침표가 없을지 몰라도, 인생에는 마침표가 있다. 인생의 마침표는 죽음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생 마침표는 무덤에 묻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즉 죽음이 아니라 다시 삶이다. 만약에 예수님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면 인생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다.

부모님이 하나님 품에 안기시면 마침표가 잘 찍히지 않는다. 도돌이표가 찍힌다. 꿈에서라도 다시 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마침표가 있다. 하루에도 마침표가 있다. 하루를 시작하면 끝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의 마침표는 시간적으로는 밤 12시다. 밤 12시가 되면 하루가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마침표는 시간이 아니라 쉼이다. 하루 마침표는 잠자리는 듦으로 쉼의 시간을 갖는 때다.

책에도 마침표가 있다. 손에 들려진 책을 다 읽은 것이다. 진짜 마침표는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책 출간에도 마침표가 있다. 책 출간의 마침표는 오타 없이 출간되는 것이다.

책에만 마침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도 마침표가 있다. 마음의 마침표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마음에 가득 채워진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면, 마음의 마침표를 찍었다라고 할 수 없다.

신앙의 마침표는 예수님이다

하루에도 마침표가 있다. 인생에 마침표가 있다. 시작에 마침표가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마침표가 있다. 신앙의 마침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 외에는 더 보탤 것이 없어야 한다. 신앙이란 예수님 외에 더 보탤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본 회퍼’로 불리는 복음주의자인 앤드류 팔리(Andrew Farley)가 쓴 책 제목이 《복음에 더할 것은 없다》이다. 복음에 더할 것이 없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만약에 자기 생각이 보태지면 종교생활이 된다.

이단이란 예수님께 마침표를 찍지 않는 집단이다. 이단은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을 보탠다. 예수님을 대신 종교 집단 우두머리를 구원자로 만든다. 그들에게는 마침표가 예수님이 아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설교자이자 미국 제2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병상을 지키며 비탄에 빠져 두려워하던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러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성경은 ’믿음‘이 핵심적인 단어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심비에 새겨야 예수님께 마침표를 찍힌다

예수님을 마침표 찍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을 심비에 새기고 산다. 오늘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길 원한다(2절).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지 않으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마치 노아의 시대에 온 땅이 홍수로 덮인다고 했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것과 같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다고 사위들에게 말했지만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긴 것과 같다.

예수님을 심비에 새기지 않으면, 조롱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흔들린다. 더 나아가 부정하게 된다. 4절에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비아냥거린다.

비아냥거리다 멸망한다. 노아 때가 그랬다. “노아 때도 그냥 세상이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다(6절)”.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지 않으면, 반대자들이 나타날 때 의심한다. 즉 ‘과연 그럴까?’ 라고 생각한다. 결국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재림을 믿지 않게 된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심비에 새긴 사람들이다. 성도란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심비에 새긴 사람이다. 예수님의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재림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이 다가오면 흔들린다. 어려움이 닥치면 매우 흔들린다. 하지만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더욱 단단해진다.

흔들림을 통해 도리어 단단해진다. 흔들림을 통해 견딤을 배운다. 오랜 시간 견딘 것이 오래 사용된다. 견딤의 기간이 사용 연수를 결정한다.

견디면 심비에 깊이 새겨진다

일본의 니시오카 궁목수 가문에서는 천 년 노송으로 집을 짓고 나면, 언젠가는 후대에서 사용할 거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다시 소나무를 심었다. 천 년을 내다보며 집을 짓고, 천 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백제 금당벽화가 있는 호류사를 지은 목재 일부를 대패질하면, 천 년 된 노송의 향긋한 솔내가 난다고 한다.

오랜 견딘 노송이 오랜 시간 쓰임받는다. 이뿐 아니다. 오랜 시간 견디고 나면 견딘 기간만큼 향기가 난다.

견딤이 중요하다. 견디되, 오래 견뎌야 한다. 오래 견딘 것이 오래 쓰임 받는다. 큰 비행기가 활주로가 길어야 한다. 한 번 호되게 고통을 겪으면 그 보다 약한 것은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베트남 나트랑의 빈폴렌드에서 청룡열차를 탔다. 청룡열차를 탈 때, 거반 죽는 줄 알았다. 괜히 탔다고 후회를 엄청 했다. 하지만 청룡열차를 탄 뒤, 다른 놀이 기구를 타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견디면 단단해진다. 오래 견디면 더욱 단단해진다. 심지가 견고해야 한다. 믿음의 심지가 견고해야 한다. 성경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신다(사 26:3)”고 하신다.

신앙의 심지가 견고해지려면,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하나님의 종말이 내 것 된다.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5절). 그러므로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야 한다.

심비에 새겨지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럼 왜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야 내 것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되기 때문이다(2절).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되지 않으면 흔들린다. 종말이 흔들린다. 신앙이 흔들린다. 하지만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님이 심비에 새겨있지 못하면 신앙의 줏대가 없게 된다. 자주 하는 말 중에 ‘줏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꿋꿋하게 지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줏대가 없으면, 신앙을 꿋꿋하게 지키지 못한다.

사사기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로 관통된다. 왜 사사기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는가? 신앙의 줏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심비에 새기지 못했다.

‘손잡이’ 신앙인이 되어라

예수님을 심비에 새기면, 손 놓기 신앙이 아니라 손잡이 신앙이 된다. 손놓기 신앙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하지만 손잡이를 잡는 순간 넘어지지 않는다. 문고리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문고리 신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의 심비에 새겨진 상태다.

김겸섭은 그의 책 《사랑이 위독하다》에서 손잡이와 문고리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흔들거리는 전동차 안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손잡이를 잡아야 한다. 어둔 밤에도 문을 쉽게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고리, 그것이 손잡이다. 손잡이가 있음으로 삶은 안전을 누리고 편리를 누린다. 손잡이가 부서진 삶은 벼랑을 가슴에 이고 사는 삶이다.”

그는 절제는 삶의 손잡이라고 한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발을 꽉 붙잡아 추락에 제동을 걸어 줄 강력한 손잡이가 절제라고 한다.

신앙생활의 문고리는 하나님 말씀이다. 문고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생활 할 때 문고리 역할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흔들린다. 말씀이 문고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뢰가 관건이다

신앙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이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

박현모는 그의 책 《세종의 적솔력》에 ‘불가동야(不可動也)’를 이야기한다. ‘불가동야’의 뜻은 ‘흔들거나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말은 ‘왕의 신뢰어린 한마디가 인재를 구한다’ 라는 뜻이다.

신하에 대한 왕의 신뢰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신뢰가 중요하다.

왕의 신뢰로 큰 장수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종서 장군이다. 김종서는 태종 때 일을 잘 못해서 매나 맞고 다니는 별 볼 일없는 관리였다.

그런 그가 세종을 만나서 6진을 개척하고 사민정책을 추진하는 등 국가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모함에 빠진 김종서의 입장을 들어주면서, 모함을 받은 김종서를 신임하여 변호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한 나라의 기둥과 같은 장군이 되었다.

신하들을 신뢰했기에 세종대왕은 가장 찬란한 조선을 만들었다. 일본의 이토 준타로 등이 1983년에 편찬한 <과학사 기술사 사전>에 세종 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시대라고 한다.

세종 재위기간인 1418년부터 1450년 사이 세계를 뒤흔들만한 과학기술 업적, 지금으로 치자면 노벨상을 받을만한 업적이 무려 21건이나 쏟아져 나왔다. 같은 시기 중국 4건, 일본 0건, 유럽과 아랍지역을 통틀어 19건이었다.

이는 세종대왕이 신하들을 철저하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신뢰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음이다. 말씀을 굳게 잡지 않음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다.

뿌리가 깊어야 한다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시57편 7절에서 그의 신앙관을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마음을 확정했다는 것은 딱 한 곳에 꽂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마음이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확정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심비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 그럼 시대의 조류나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순간 비참한 인생, 삭막한 인생이 된다.

‘용비어천가’에 이런 가사가 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도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고 솟아나므로, 내가 되어서 바다에 이르니.”

공자도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타인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한다. 세상에 휩쓸리거나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심비에 확고하게 박혀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뿌리 깊이 박혀야 한다. 그럼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만을 붙잡고 살아가게 된다.

심비에 새겨지면 내 것이 된다

하나님이 심비에 새겨지면 내 것이 된다. 심비에 새겨지지 않으면 내 것 되지 못한다. 뿌리가 깊이 박힌 나무는 뽑히지 않는다. 뿌리가 깊지 않으면 바람이 불면 뽑힌다.

예수님이 심비에 박혀야 한다. 예수님이 심비에 박혀야 예수님의 은혜가 내 것이 된다. 예수님이 심비에 박히기 위해, 예수님과 거리가 친밀한 거리보다 짧아야 한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애드워드 홀은 거리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거리는 친밀한 거리(0-46cm), 개인적 거리(46cm-1.2m), 사회적 거리(1.2-3.6m), 공적인 거리(3.6-7.5m)로 이야기한다. 그 중 친밀한 거리는 서로의 팔 길이 만큼의 거리다. 이는 친구나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의 거리다.

요즘 중국에서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 거리가 아주 멀어졌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거리는 아주 짧아야 한다. 친밀한 거리여야 한다.

그럴 때 팔만 뻗으면 되는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 구원 등이 내 것 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