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여백이 있었다
태초에 여백이 있었다

홍순관 | 새물결플러스 | 168쪽 | 10,000원

초보 목사들이 설교할 때 하는 실수 중 하나는, 설교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한다는 것일 게다.

많은 신학서적과 신앙서적을 참고하고, 제한된 설교시간 안에 예화도 여러 개 담으려다 보니 설교가 산만해지고 말하는 속도는 무척 빠르게 된다.

본인 자신도 자신이 말하려던 것을 제대로 다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쏟아낼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설교를 잘 했다고 착각한다. 어떤 부교역자들은 자신의 담임목사의 설교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자만한다.

필자도 이러한 실수를 자주 범해왔다. 설교 전 많은 책들을 쌓고 준비하지만, 정작 그 책들의 절반도 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설교하곤 했다.

듣는 이들에게 그런 설교는 무언가 준비는 많이 한 듯 하고 들은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정작 설교가 끝난 뒤에는 무엇을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소방 호스로 엄청난 수압으로 물을 쏟아내는 앞에서 컵에 물 받기 같다고나 할까?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졸졸 나오는 수도꼭지만으로 족하다.

설교만 그런가? SNS로 쏟아지는 많은 정보들, 요샛말로 하면 ‘TMI(Too Much Information) 속에서’ 우리는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정보의 소화불량 속에 살아간다.

<태초에 여백이 있었다(홍순관, 새물결플러스)>는 그런 점에서 요새 시각 속에서는 텅 빈 책이고 게으른 작가의 책처럼 보여진다. 200쪽도 안 되는 얇은 책에 제목마냥 꽉꽉 종이를 채운 다른 책과 달리, 글씨 없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고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페이지도 여럿 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어떤 땐 비슷한 내용의 반복인 것 같고, 예컨대 정보라 할 만한 것도 얼핏 보기에는 별로 없는 듯 하다. 일종의 가성비가 떨어지는 책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처럼 여백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냥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캔버스라면 별로 의미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점 하나가 붓으로 찍혀 있다면 그 흰 캔버스와 점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것이다.

비어있는 바둑판과 돌 몇 개가 놓인 바둑판은 그 해석과 의미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지닌다. 꽉 찬 캔버스와 바둑판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지만 그저 종결과 완성의 의미이고,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크레테 그리스 하우스 색상 돌 풍경 휴일 바다 블루 여름 물 태양 비치 아우라
▲ⓒ픽사베이
민중가수(?), CCM 가수라는 두 타이틀이 이상하지 않은 홍순관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여백을 가르쳐준다. 아니 보여준다. 숨, 소리, 흙, 바람, 물, 나무, 여백 등 꽉 차여진 것이 아닌 것들을 통해 ‘TMI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조금 쉬면서 생각하고 산책하며 이런 것들을 느끼길 노래한다.

하나님은 주일에 안식할 것을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열심 있는 이들은 주일에 교회 갔다 온 뒤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경우들이 많고, 또 그것을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목회자들도 교회는 프로그램과 행사로 성도를 정신차리지 못하게 뺑뺑이 돌려야 교회가 부흥하고 시끄럽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 우리는 여백 없는 교회, 숨쉴 틈 없이 목을 조르는 공동체에서 밀려나 잊혀져버린 이들을 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떨어져 나가 신앙의 여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텅 빈 캔버스 같은 신앙만 갖게 되는 이들도 있다. 아니 그 안에 있는 이들은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 이들을 볼 새도 없다. 그들에게는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새가 없고 그저 그들의 시각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곤 한다.

이 책은 여백을 보여주고 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통해 생각하게 한다.

요새는 설교할 때 아무 말 없이 몇 초간 가만히 있을 때가 있다. 주석도 많이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말씀을 통해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어떤 때는 설교 준비도 책상과 컴퓨터보다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걸어가며 생각할 때 더 깊게 이루어질 때가 많다.

우리에게 여백과 쉼을 주신 하나님을 이 책을 보며 더욱 생각하게 된다.

문양호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