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나사렛 예수는 “랍비”(rabbi)였다. “랍비”란 문자적으로 ‘나의 큰 자’를 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생님!’ 하고 부르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랍비”라는 호칭을 율법 전문가이자 선생인 서기관을 존경하는 뜻으로 부를 때 썼다. 제자들은 예수를 “랍비”라 불렀다. 예수는 당시 랍비들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숙식(宿食)을 같이 하면서 가르쳤다. 예수는 당시 유대 율법의 전통과 관련하여 혁신주의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는 그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는 심지어 신성모독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상 예수는 원칙없는 급진 혁신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살리고자 하였고, 모세와 선지자의 정신을 계승한 자였다. 예수는 역사상 모든 선생 중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은ㅑ 독특했을 뿐 아니라 그는 가르침대로 살았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I. 랍비(현인, 賢人)로서 예수

예수는 “랍비”(선생)라고 호칭을 받았다. 요한의 제자였던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를 좇으면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 1:38)라고 질문한다. 예수 자신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하여 “랍비”(종교적 선생)로 인정함을 받았다. “랍비”(rabbi) 용어는 1세기에 이르러 보편화 되었고, 이후 유대교의 지도자라는 뜻으로 정착되었다. 랍비가 될 사람은 구약성서와 탈무드에 대한 연구과정을 거쳐야 한다. 랍비 교육 과정에는 다양하고 총체적인 지도력 배양을 위한 과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기능은 유대교 내의 다양한 분파들에 따라 서로 다르다. 유대인들 사이에도 정통파 ·보수파 ·개혁파가 있어 분파마다 랍비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 일반적인 기능과 역할은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하며, 각종 교육활동에 폭넓게 참여한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와 봉사활동에도 관여하며, 여러 형태의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기도 한다. 일부 랍비는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면서 시간제 봉사직으로 랍비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공식으로 임명받은 랍비가 없는 경우 공동체 내에 의식을 행할 만한 경건함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 랍비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14세기 이후 랍비들에게 봉급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생활에 구애받을 경우 그 직책수행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랍비의 제자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예수는 스스로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묵상하면서 율법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자신 만의 율법 이해를 터득하였다. 예수는 율법의 형식적 규례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가르쳤다. 예수는 율법 규례의 외형적 준수(안식일 준수, 정결 규례 준수 등)에만 치중하는 당시 종교관례를 무시하고 율법의 정신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율법 선생들과 회당의 지도자들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양심있는 종교인들은 예수를 진정한 “랍비”로 생각하였다. 니고데모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산헤드린의 공회원인 니고데모란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예수는 당시 랍비로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는 달리 왕이나 권세 잡은 자들에게 가까이 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나 병든자들과 가난한 자들 등 소외계층과들에게 가까이 하였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자기 집,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셨을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막 2:15; 눅 5: 27). 이를 바리새인들이 그 제자들에게 힐문(詰問)한다: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이에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으며,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 눅 5:31-32)고 대답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 12-13).

예수는 열심당이나 폭도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요 그 자신이 하나님 왕국의 메시아로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구속하시고자 대속물이 되시고자 했던 선생이다. 예수는 교권주의자들에게 복음의 본질이란 제사나 예식이 아니라 인자와 긍휼이요 의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참으로 복음을 체험한 자는 외적인 종교적 형식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와 의식이 갖추어야할 내면성인 인자와 긍휼과 자비를 먼저 추구한다.

예수의 사상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형식적인 적용을 거부하고 그 동기와 내면성을 철저히 하는 방향으로 율법의 정신을 해석하였다. 예수는 손을 씻는 등 형식의례적 정결요구보다 내면적 순수성, 즉 내적 정결을 강조하였고. 안식일의 외면적 준수보다 안식일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는 외적 정결법과 안식일법과 관련하여 유대 장로들의 전통과 마찰을 일으켰다. 예수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면적인 것(씻고 씻지 않음)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것(음란, 탐욕, 살인 등)이며, 안식일에도 병든 자의 치유를 위하여 병고치는 일, 가축을 위험에서 구출해 내는 일 등은 안식일 정신에 맞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는 당시 제도적 유대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율법을 모독하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윤리(사랑의 계명)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모세 율법의 차원을 하나님 나라의 차원으로 고양시켰던 것이다. 그는 로마 제국에 비판적이며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나 체제를 전복시키는 무력 혁명을 추구한 유대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파하고 복음을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도록하는 하나님 나라 보편주의를 가르치고 그 윤리를 가르치고 실천한 랍비로서 유대 현인(賢人)이었다.

II. 예수의 교육방법
1. 말씀으로 가르침

예수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는 간음하다 현장에 붙들린 여인에 대한 송사(訟事)에서 땅에 글을 쓰신 것(요 8:8)만을 제외하곤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쳤다. 예수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의 밭에 뿌리셨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3b-8). 씨는 복음이요,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은 사람의 마음이다. 길가의 마음은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돌밭의 마음은 복음을 믿다가 이내 포기해버린다. 가시떨기의 마음은 복음을 믿되 여러 가지 유혹으로 인해 결실이 없다. 좋은 땅의 마음은 복음의 씨가 떨어져 싹이 나고 줄기가 퍼지고 열매를 맺는다.

복음은 종교나 교회제도나 성직자의 소유가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옛 사람이 변화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가시적인 제도와 인간을 새롭게 가동시키는 새 생명 소프트웨어(software) 프로그램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 개인과 사회와 제도와 국가에 들어가 작동하면 개인, 사회, 제도, 국가가 변화된다. 18세기 웨슬리와 휫필드의 복음을 들은 영국사회와 조나단 웨드워드의 복음을 들은 미국 뉴잉글랜드 사회가 그러했고 19세기 찰스 피니의 복음을 들은 미국 사회가 그러했고, 20세기 초기 평양 대부흥의 한국사회가 그러했다. 복음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인격 자체이다. 그분을 모시는 개인과 가정과 단체와 사회와 국가가 새로움을 받는다. 새로움이란 새로운 인격이요 새로운 가치관이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2. 사실에 대한 가르침

예수의 교훈은 사실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정제된 가르침이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반신불수병자를 고친 일(마 12:10),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청년과 대화(마 19:16), 제자들의 서열다툼(눅 9:46). 세금을 내는 일(마 22:17) 등에 있어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다. 그의 교훈은 비록 이천년 전의 일이나 이 교훈이 지니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예컨대,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비난을 하자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그리고 예수는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다. 여기서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안식일의 정신을 가르치신다.

경건한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율법을 지켰다고 말하는 청년에 대하여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고 말씀하신다. 이에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여 갔다. 예수는 아직도 세상 재물에 대한 미련과 애착 속에 있는 부자청년의 미흡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서열다툼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는 어린아이 하나를 자기 곁에 세우시고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b)라고 겸손을 가르치신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 대하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라는 명대답을 하신 것은 오늘날도 교회와 국가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지침이 된다.

3. 인격적 감화

예수는 인격적 감화를 통하여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들의 삶에 내면적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도록 하였다. 예수는 밤중에 자기에게 찾아온 바리새파 종교인(宗敎人)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5b-8). 율법과 죄의 굴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빛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 나게 된다. 이러한 교훈으로써 예수는 그날 밤 니고데모를 외형적 율법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 나오도록 하였다.

예수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행실이 좋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시는 갈하지 않는 마음 속의 생수를 가르쳐주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b-14). 여인이 이러한 물을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는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신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예수는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 그녀는 변화를 받는다.

부활하신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저들과 조반을 같이 하신다. 조반 후 예수는 자기를 배신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질문하시며 인격적 관계를 다짐하신다.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는 그러면 “내 양을 치라”고 가르치신다(요 21:15-17). 예수는 베드로가 내면적으로 스승을 부인했던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세번이나 다짐하시고 인격적인 결단을 하도록 하신다.

4.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방식

예수는 듣는 자의 처지에 자신의 입장을 세워 놓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급히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빨리 결론이나 처방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모범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할 때 처음부터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대화자 스스로 인지하도록 한걸음씩 유도하셨다. 여인이 현재 동거하는 자도 진정한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로부터 지적받자 여인은 이 분이 선지자임을 알게 된다. 여인은 말한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19b-20). 이에 예수는 대답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메시아가 오면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라고 예수는 다르치신다. 여인은 말한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이제 예수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요 4:26).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도 이러한 방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예수는 처음부터 모두 믿으라고 요구하지 아니하셨다. 초보의 믿음을 가진 자도 환영했다.

5. 비유 사용

예수는 복음을 설교하실 때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는 복음 전파를 씨뿌리는 자, 밭에 감추인 보화, 가라지와 알곡,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탕자 이야기 등 우리들의 삶의 세계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을 근거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설교는 누구든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세계 속에 그 근거로서 있다. 하나님 나라는 저 멀리 천국에만 있는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친숙하게 살고 있는 세상 속에 우리의 삶에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주는 근거로서 임재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설교하시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저 멀리 게시지 않으시고 그이 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

둘째, 슬기로운 자는 이해하나 미련한 자는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씨 뿌리는 자(마 13장)의 비유로 설교하시는 의도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10).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복된 소식이나 마음의 문을 닫은 자들에게는 여전히 비밀이다. 누가는 다음같이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눅 8:10). 마태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여전히 비밀의 복음이다. 영적으로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 사람만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를 아는 원리와도 연관된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역사적 예수를 바르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영지주의가 말하는 신비로운 지식에 관한 비밀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공개적인 보편적 진리에 대한 단순한 신뢰와 동의와 인격적 수납을 말한다.

6. 반복적으로 가르침: 암기와 기억의 중요성

예수가 살았던 당시는 문자 전달의 시대보다는 구두 전승이 주가 되는 시대로서 그는 구두로 가르쳤다. 오늘날처럼 활자나 문자적 매체가 주가 되는 시대에서는 한 번의 발표가 매체에 그대로 전달되나 당시는 구두로 전달되는 시대로서 한 번 말한 메시지는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예수는 반복적으로 가르치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군중들의 암기와 기억을 환기시켰다. 구두의 말씀은 듣는 제자들에게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예수는 이들의 암기를 위하여 메시지를 반복하였고, 기억에 남도록 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치면서 그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 도래와 사랑 윤리의 핵심을 전달하였다. 예수는 반복적으로 가르침으로써 메시지 내용을 강조하시고 그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가 제자들과 청중들의 뇌리(腦裏)에 박이고 새겨지도록 의도하신 것이다.

예수는 고정적 장소에서 정해진 청중들에게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 방랑 설교자로서 매순간 새로운 장소와 다가오는 순간적으로 만나고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여 거기에 적합한 메시지를 정취자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설교는 생동적인 사건(event)으로서 그냥 있는 물건(thing)이 아니고 고정적인 원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듣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공관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 말씀에 대한 다양한 버전(diverse version)이 가능하며 4복음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설교는 불변성과 다양성, 고정성과 유동성의 특징적인 결합이 있다.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가르침인데 그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이나 그 가르침을 반복하는 방식은 다양한 것이다. 그리하여 에수의 메시지에서는 동일성 내의 변이(variation in the identity)라는 구전(口傳)의 원칙이 나타나고 있다.(계속)

김영한 박사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