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십자가 예수 나무 성금요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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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가복음 5장 35-43절


보는 것은 힘이다

사람에게는 오감이 있습니다. 오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다섯 가지 감각을 의미합니다. 감각의 민감도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청각이 예민한 사람도 있고 후각이 예민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 중 70-80%를 시각으로 얻는 다고 합니다. 곧 사람은 오감 중에서도 시각이 가장 발달돼 있다는 것입니다.

시각이 가장 발달되었기 때문에, 사람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고 살아가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르게 보는 사람은 다르게 사는 힘을 가진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곧 힘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표현 중 ‘척 보면 안다’, ‘안 봐도 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본다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려면 생각하는 머리가 달라져야 한다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보는 눈과, 위기 속에서 위협을 보는 눈입니다.

사람들은 동일한 현상을 보더라도, 각기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내가 무엇을 듣고 보았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려면, 특히 생각하는 머리가 달라져야 합니다.

스키폴 공항의 소변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남자 화장실에 설치된 소변기가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공중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변기가 화제가 된 이유는, 소변기 안쪽에 붙어 있는 파리 때문이었습니다.

이 파리는 실제 파리가 아니라 일부러 붙어놓은 파리 모양의 스티커였습니다. 왜 소변기에 파리 스티커를 붙여 놓았을까요?

보통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기 위해 자세를 잡으면, 눈앞에 이런 문구가 보입니다. “문화 시민은 한 발짝 더 다가섭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은 아닙니다” 이 말은 소변이 소변기 밖으로 튀면 위생상 좋지 않기 때문에 ‘조준을 잘 하라’는 문구입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런 안내문에 아랑곳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키폴 공항 남자소변기에 파리 모양의 스티커를 붙여놓은 이유는, 소변이 변기 밖으로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상한 것은 소변기 안에 파리가 붙어있으면, 남자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소변을 위해 자세를 취한 남자들은 소변기 가운데 붙어 있는 파리를 보는 순간, 그 파리를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실험을 해 보니, 파리 스티커가 없을 때보다 소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이 80%나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했을 뿐인데, 이런 엄청난 효과가 일어났습니다.

남다른 생각이 남다른 생활을 하게 한다

‘생각’을 한자로 풀어보면, 살아 있는(生) 깨달음(覺)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이 살아 있는 깨달음으로서 기능하려면, 다르게 생각하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루에 5만 가지 이상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누구나 생각한다고 하지만 과연 정말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습관적인 행위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이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팔자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생각이 생활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생활을 하려면, 남다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서, 멋진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남다른 생각만이 다르게 보는 실력을 가지게 합니다. ‘남다른 생각’만이 ‘남다른 생활’을 하게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 지방, 곧 거라사 지방에서 한 사람의 미치광이를 고쳐주시고, 다시 배를 타시고 맞은 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많은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한 사람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곡하게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사람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이였습니다. 나이나 신분적으로나 사회적 위치로 볼 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대교에서는 볼 때 ‘이단’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이런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 일로 인해 회당장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고,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어찌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모든 결과가 초래될 것을 알면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딸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자신의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하는 야이로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가는 도중에 어떤 사건이 발생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만짐으로 치유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로 인해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찰나, 회당장의 집에서부터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 7:35)”.

이 말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죽었으니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데리고 가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도, 야이로는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향합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이미 이웃들까지 와서 회당장의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은 후 예수님과 야이로가 오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왜 떠들고 우느냐고 하시면서,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죽었는데 잔다고 하니, 사람들은 기가 차서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 보시기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죽은 것으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자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실력 차이입니다.

자는 아이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깨우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이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다르게 보는 것이 실력인 이유

왜 다르게 보는 것이 실력입니까? 다르게 본다는 것은, 곧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남보다 앞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달랐다

<스티브 잡스의 혁신의 비밀>을 출간한 세계적이 스피치 강사 카민 갤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잡스의 아이디어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나온다. 애플의 성공비결은 아주 간단하다. 스티브 잡스가 다른 기업가들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잡스는 그의 친구와 고작 1,00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00만원이 좀 넘는 돈으로 컴퓨터 회사를 차렸습니다. 회사의 이름을 애플이라고 했습니다. 애플이 컴퓨터 회사 이름으로 어울리는 이름입니까? 애플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사과입니다.

우리나라 컴퓨터 회사 이름을 ‘사과’라고 지었다고 생각해 보십니다. 상식적으로 안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잡스는 컴퓨터는 단순하고 쉬워야 한다는 자신의 비전을 담아, ‘애플’이라고 지었습니다. 컴퓨터 회사의 이름이 첨단의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잡스는 서예 공부를 하면서 맥 컴퓨터의 아름다운 활자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메이시 백화점의 주방용품 코너를 보고, ‘가정에서 사용하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컴퓨터의 근본 개념을 가져 왔습니다.

잡스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력입니다.

아오모리현의 ‘합격 사과’

일본 아오모리현은 풍부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지 덕분에 예부터 사과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각광 받아 왔습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사과는 일본 전역으로 배송되어 판매되었는데, 사과의 품질이 우수하여 해마다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91년 아오모리현은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태풍이 불어닥쳐, 아오모리현의 사과 생산농가에 큰 피해를 입혔던 것입니다. 피해가 워낙 커서, 출하할 수 있는 사과의 양이 전년도 생산량의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과수 농가들은 대책 마련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비바람에 출하 가능한 사과들마저 품질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쉽사리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한 농부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태풍에서 살아남은 사과들을 ‘합격 사과’라는 이름으로 판매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입시철이 되면, 우리나라처럼 수험생들에게 합격을 기원하는 선물을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농부는 태풍이라는 시련을 이겨내고 열린 사과가 시험이라는 힘든 시기를 이겨내야 하는 수험생들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농부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그 해 아오모리현의 사과는 ‘합격 사과’라는 이름으로 출하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과의 품질과 생산량 모두 작년에 비해 떨어졌지만, ‘합격 사과’라는 이름을 사용한 덕분에 작년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합격 사과’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수험생 선물용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아오모리현 사과 생산농가에 큰 수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태풍으로 인해 사과품질이 떨어진 것만 보았습니다. 수확량이 너무 작은 것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한 농부는 ‘태풍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과’를 보았습니다. 다르게 보는 것이 곧 실력입니다.

다르게 보는 것은 영적 실력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죽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예수님의 눈에는 자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예수님에게는 영적 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만 바라보고 힘들어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고난 자체만 바라보면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고난의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시인은 고난 당하는 것을 고난 자체로 보지 않고, 유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인과 같은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고난을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고난 같지만, 사실은 축복을 안고 오는 변장된 축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있지 않는 분들은 ‘고난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없다고 생각되는 지금, 고난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실력을 길러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이 닥쳤을 때 고난을 고난 자체로 보지 않고 변장된 축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을 버려야 한다

주위를 보면 집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계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착은 삶을 훼방놓는 불청객과 같습니다. 집착이 일어나면 자신만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집착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기 때문에,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에게만 집착했습니다. 자신의 왕위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다윗의 충성이 아니라, 자기보다 잘난 다윗이 보입니다. 백성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만을 생각합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르게 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집착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 이상, 다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라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협력, 합작, 협동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60세가 넘은 김창완이라는 가수와 21세기 아이돌 스타인 아이유가 ‘너의 의미’라는 곡을 함께 불렀습니다. ‘콜라보’를 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곡이 발표 되자마자 음원 순위 1위를 휩쓰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입니다.

아이돌 가수가 60세 가수가 함께 노래를 한다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틀을 깨는 것입니다. 그 틀을 깼을 때,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다르게 생각하니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설교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성경 이야기만 해야 한다. 성경만 잘 풀이해 주면 된다.” 공부를 하면서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목사의 관점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성도들이 듣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선포하는 것은 맞지만, 그 설교를 성도들이 이해하고 그렇게 살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성도들의 눈높이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성도들의 눈높이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니까, 성도들이 반응하고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의 눈높이 맞추기 위해, 들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지만, 행복했습니다.

다르게 보기 위해 해야 할 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르게 볼 수 있을까요? 첫째,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보려면 사물과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합니다. 사건을 가까이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몽골 사람들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기 때문에 시력이 좋다고 합니다. 멀리 보아야 좋은 시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물과 거리를 두면, 그제야 보이는 세계가 있습니다. 거리를 두는 것은 욕망을 내려놓는 작업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히면, 돌이 황금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황금을 황금으로 보지 못합니다.

집착증은 어떤 것에 눈을 떼지 못하는 병입니다. 눈을 떼는 훈련을 해야 넓고 멀리 볼 수 있습니다.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는 억지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눈앞에서 달랑거리는 당근 하나에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돼지의 눈에는 죽음의 길은 보이지 않고 당근만 보입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어집니다. 그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 것만 보면 끌려 다니게 됩니다.

아무리 굶주렸다 해도, 눈앞에 떡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면 큰일이 납니다. 코 앞에 펼쳐진 것에 눈을 떼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침착함과 평안은 멀리서 바라볼 때 주어집니다. 멀리 보는 눈이 지혜를 얻게 됩니다. 멀리 보면 길이 보입니다.

멀리 보는 사람은 욕망의 덫에 걸려 들 일이 없습니다. 멀리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멀리 보는 것이 실력입니다. 인생은 멀리 보는 싸움입니다.

둘째,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말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딸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회당장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회당장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이제 끝났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믿고 따라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임을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눈이 있으면 환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 뒤에 서 계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문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해답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거꾸로 가는 것이 정답이다’는 말입니다.

‘오마바 대통령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투자자들이 탐욕을 내고 덤벼들 때는 두려워해야 하고, 그들이 두려워 할 때는 탐욕을 가져야 한다.”

곧 이 말은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볼 줄 아는 것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집착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으시고, 무엇이든지 거리를 두고 믿음의 눈으로 보려고 해 보십시오.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는 “인문학 독서를 신앙생활이나 예수님과 연결할 수 있다”며 “글쓰기를 처음 배웠을 때는 폭이 좁다며 혼도 많이 났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