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마음의 보좌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대충, 쉽고, 편하게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훈
▲예배를 인도중인 백성훈 목사.
필자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여 찬양할 때가 많았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한 마음에 찬양했었지만, 돌이켜 보면 어떤 구체적인 표현을 고민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찬양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기도합니다’라는 보편적인 표현 안에 제 모든 마음을 담았다 생각하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묵상하면서, 그런 필자의 찬양이 부끄러워질 때가 많았습니다. 시편 기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 속에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아름다운 고백들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시인의 표현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토록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지 감탄할 때가 많았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속성들을 정확하고 많은 지식으로, 풍성한 감정적 정서로, 그리고 삶의 다양한 경험들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하면 필자는 마치 습관처럼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버리는, 아주 단순한 고백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의미를 포함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귀찮았고, 대충 고백하려는 게으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통치를 나의 일상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시편 47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신년 초하루마다 사용했던 찬양시입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표현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필자로 하여금 얼마나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는지를 깨닫해 해 줄 정도로, 참 기막힌 표현들이 나옵니다.

가장 강조되는 표현은 ‘통치하시는 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통치’에 대한 묵상은 놓칠 때가 많습니다. 통치는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통치하실까요? 이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라는 신앙고백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즉 나의 주인이라는 신앙의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통치하실까요?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통치하실까요? 과연 우리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그 통치를 경험하고 있을까요? 그 경험이 있어야, 구체적인 찬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성도들과 함께 삶의 은혜를 나누었는데, 유독 제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일상을 소개하며 그저 반복된 삶에 아무런 문제 없이 지냈고, 특별한 은혜도 고난도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요즘은 정말 특별한 문제 없는 일상이 그저 감사한 시대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런 삶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소극적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과연 일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를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은혜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상황적 고백보다, 내 영혼이 실제적으로 경험하여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되는 상태적 고백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해 찬양의 처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1절)”.

여기서 ‘만민들’이라는 표현에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어떤 자부심과 존경의 마음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감히 자신뿐 아니라 만민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되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를 외치라고 명령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등에 업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담대하게 자랑하는 듯 선포합니다. 마치 구체적인 은혜가 있으니, 구체적으로 표현하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집 근처 골목에서 친구랑 싸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 뒹굴면서 싸우고 있는데, 언뜻 누가 옆에 있는 듯 해서 쳐다보니, 아버지가 나와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더욱 당당하게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우리 아빠 왔어. 너 이제 죽었어.” 그러고 나서 싸우는데, 정말 더 큰 힘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시인이 그런 마음으로 만민들을 향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찬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게 되면 내 영혼이 회복됩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2절)”. 이 구절에서 지존하다는 말은 더없이 존귀하다, 더없이 높고 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존귀하심을 함께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뒤따라오는 것이, 바로 그분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에 대한 묵상입니다.

왜냐하면 창조, 통치, 존귀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도저히 우리가 찬양하고만 있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지고, 높고 높은 그분의 위엄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이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하며, 우리 영혼이 깨어 일으키는 은혜로 작용합니다. 이것이 시인의 찬양에 담겨 있는 그가 아는 하나님입니다.

5절은 이런 시인의 찬양이 어떤 중요한 예식을 연상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5절)”.

이것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올 때를 생각나게 합니다.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들였겠습니까. 언약궤를 들인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 중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왕들은 하나같이 언약궤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반대로 주변 이방국가들은 다신론 신관을 유행처럼 가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무너뜨리고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언약궤가 드디어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를 바라보며 그들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8절)”.

지금 우리에게 거룩한 보좌는 어디입니까? 교회의 강단도 아니고, 성경책도 아니고,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바로 내 마음의 보좌입니다. 내 신앙의 중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일상에 모든 사람과 상황까지 통치하십니다

필자는 고교 2학년때 당시 고향에서 가장 컸던 모 교회에서 고등부 회장을 했고, 3학년 때 학교에서 기독 동아리 회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그런 자리들을 맡으면서, 교회 일에 전념했고 학업을 게을리 했습니다.

한 번은 성적이 너무 떨어져서, 담임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교무실에는 저와 함께 한 명이 더 불려갔는데, 그 친구는 다른 교회 학생부 회장이었습니다.

불신자였던 선생님께 두 사람이 함께 불려가서 성적이 떨어진 이유를 추궁 받았고, 신앙도 좋지만 공부를 놓치면 안 된다는 진지한 권면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너희들이 믿는 예수님이 너희가 인생을 게을리 사는데도 잘 되도록 도와줄 거 같아?” 우리는 동시에 “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기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다고 믿는 너희들이 공부도 안 하면서 나중에 성공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을 보니, 그 하나님은 참 이상한 하나님인거 같아. 내 생각엔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원하지 않으실거야. 그냥 너희들이 그걸 원하는 거겠지. 나는 아직 하나님을 안 믿지만,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이왕 믿으려면 하나님을 똑바로 믿었으면 좋겠다.”

그 말을 듣고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교실로 돌아가 펑펑 울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불신자 선생님을 통해 필자에게 말씀하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그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불신자였어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세상을 통해서도 교회에 말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를 교훈하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과 상황들을 활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 마음의 보좌에는 나 스스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보좌에 지금 누가 앉아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런 우리의 교만을 날마다 교훈하셔서, 결국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를 날마다 누려야 합니다.

시편의 위로
▲시편의 위로 백성훈 | CLC | 280쪽 | 13,000원
우리는 스스로 세상을 다스릴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묵상하겠습니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9절)”.

우리는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부르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여기서 분명히 ‘내가 너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받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분이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의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 분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절대 우리 스스로 복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의 보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립시다. 그래서 하루의 일상에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깊이 임하여, 과연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집중하기 바랍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집중하기를 소망합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팀사역의 원리>, <시편의 위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