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죽음에 절대 권세를 부여하는 이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탐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 숭배(골 3:5)’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만이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우상이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보다 그것의 ‘능력과 강함’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보호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귀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므로 무의식적으로 마귀를 숭배한다.

또 하나님보다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므로 ‘죽음 숭배자(death- idolater)’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극단적 공포를 드러내므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자 됨’을 부인한다.

그들에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삼상 2:6)”, “하나님의 허락 없인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마 10:29)”는 말씀이 사문화(死文化)된다.

인류에 대한 ‘사망의 왕 노릇(롬 5:17)’은 한시(限時)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일 뿐, 언젠가 생명에 삼킴을 당할 때가 온다(고후 5:4).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는 말씀은 사망이 영구적 권세자가 못됨을 가르쳐 준다.

최후에 남게 될 최종적 권세자는 ‘사망’이 삼킴을 당할 ‘생명’이다. 개인적으로는 죄의 몸을 벗는 그 순간이 될 것이고, 우주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몸의 부활 시(時)이다. ‘부활의 날’은 명실공히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날이다(고전 15:54).

그 날은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는 말씀이 실체적으로 구현되는 날이기도 하다.

역사 이래 죽음이 육체의 생명을 삼켜 왔으므로 죽음이 궁극적인 승리자요 종결자로 보이지만, 죽음의 허구적 실상(實像)이 바야흐로 드러나는 날이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은 그간 얼마나 그의 허세에 자신들이 놀아났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마귀가 반드시 멸절될 이유도 그것이 ‘생명에 삼켜질 사망’에만 기생하기에, 사망이 멸절되면 더 이상 존재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날, 그도 사망과 함께 멸망될 것이다.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궁극적인 파멸에 빠뜨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일시적인 권세자 죽음에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권세’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불신앙이다. 물론 이는 ‘일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아야 한다’거나,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자체가 불신앙이나 죄’ 라는 말이 아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성도라 해서 죽음의 두려움을 전적(全的)으로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신·불신(信不信)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본능적이다.

나아가 때론 그것이 인간을 보호하고 생존력을 높이는 긍정적 역할도 한다. 예컨대 뜨거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화상을 면하게 하고 물에 대한 두려움이 익사를 막아주듯,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질병, 사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존시킨다.

만일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쉽게 죽음에 노출되어 쉬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에의 공포를 주어 ‘인류 보존’이라는 당신의 경륜을 도모하신다.

죽음과 사후(死後)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신앙을 갖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간혹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거의 100% 무신론자들이다.

십자가의 강도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도(눅 23:39-42) 그가 직면한 죽음과 사후(死後)의 심판(히 9:27)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는 그의 간청에서 그러한 심정이 읽혀진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도, 불신앙의 표현인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해 극단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은 지지받을 수 없다. 이미 지적했듯, 그것은 일종의 ‘죽음 우상화(death-idolization)’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켜 우리를 우상에서 돌이키고(살전 1:9),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켰다(히 2:15).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색케 만든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위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공포에 끌려 다닐 수 없다.

또 극단적인 죽음에의 공포가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 주저 없는 순종을 바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지양돼야 한다. 물론 주저 없는 충성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만(고전 15:10), 그 은혜 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읍함(롬 14:8, 고후 5:14-15)’과 함께 ‘죽음을 이겼다’는 확신도 함께 있다.

은혜의 사도요 죽음의 정복자 바울의 확신에 찬 고백을 들어보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지 못한 불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무지함에서 오는 ‘만용’이다. 그러나 사망의 궁극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이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에 매몰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질병관리본부
◈믿음으로 폐해지는 죽음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죽음’과 ‘구원’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온 것일 수 있다. 만일 죽음의 유입되고 폐지되는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그런 극단적 두려움은 많이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죽음의 유입’을 알아보자. 그것은 인간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파기에서 왔으며, 그것은 단지 ‘행위 규범’의 위반이 아니었다. 흔히 ‘선악과(善惡果) 언약’을 단지 ‘행위 규약’으로 보는 경향들이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 됨을 부정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신앙 규약’이었다.

아담이 타락 전 ‘선악과 언약’을 준수한 의미도 단지 ‘행위 법규’를 준수해 ‘도덕적 착함’을 보여준 것이 아닌,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아담의 ‘선악과 범과(犯過)’ 역시 단지 ‘행위 법규’를 어긴 ‘행위적 범과’가 아닌 더 근원적인 이유,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부정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려는’불신앙이고 반역이었다.

사람들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다(창 3:6)”는 선악과(善惡果) 말씀을 근거로, 아담의 범과를 ‘식욕, 명예욕, 정욕’에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 행위적인 것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고 한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후에 생겨난 결과적인 것이었지 그 자체가 죄의 근원적 동기는 아니었다.

‘아담의 원죄’를 ‘행위의 문제’로 몰아갈 때, 그것은 ‘윤리적인 죄’로 변질된다. 그리고 ‘죽음에서의 구원’을 ‘불순한 행위’의 상쇄로서의 ‘율법적 완전 행위’를 통해 이루려는 망상을 갖게 된다.

‘선악과 범과’를,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부정한 ‘불신앙’으로 이해할 때, ‘구원’ 곧 ‘죄와 죽음의 폐기’는 ‘믿음의 문제’로 파악된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고 죽음을 폐하실 때 ‘믿음’에 의해 되게 하셨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고 그 ‘믿음’은 실제 죽음을 폐한 ‘그리스도의 구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죽음이 폐한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짐으로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가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

반면 사망의 폐지를 ‘믿음’이 아닌 자기의 ‘율법적 행위’에 의존시키는 이들은 결코 사망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불완전한 행위에 의존된 그의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이기도 하고, 행위에 의존된 자들에게는 결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온 세상을 덮고 있다. 모두에게 믿음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롬 5:5)’이 마음 마음에 부어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길 기원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