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도 진리에 가까워지는 과정 아니다?
교육철학의 역사도 발전의 역사 아냐
학문의 자유가 혼란의 자유에서 벗어나려면

최휘운 독서논술 교사
▲최휘운 독서논술 교사.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 혁명의 구조>는 충격적인 책이다. 쿤은 과학이 반증(反證)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아니라 특정 패러다임을 통한 관측 과정이며, 과학 혁명이 일어나 패러다임이 바뀌면 자연의 의미도 모조리 바뀌게 된다고 설명했다(완벽한 패러다임은 없기에 과학 혁명은 필연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항상 특정 패러다임을 통해 걸러져 나온 자연만을 대했을 뿐 '진짜 자연'은 안 적이 없다는 얘기다. 사실일까? 대표적인 반증주의자였던 포퍼(Karl Popper)는 이런 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쿤의 주장을 논파할 수도 없었다. 포퍼와 쿤의 논쟁은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황이라고 한다.

비교적 객관적인 학문으로 알려진 자연과학의 상황이 이렇다면 교육은 어떨까? 교육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였을까? 교육철학은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을까? 송유진 · 김규태의 <교육철학 이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성립된 13가지 교육철학을 다루고 있다. 각 교육철학들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겹치기도 하는데, 확실한 점은 13가지 철학 모두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철학사도 발전의 역사는 아니었고,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그저 각각의 철학이 각각의 문제를 낳아 왔을 뿐이다.

이상주의(idealism) 교육은 현실을 초월한 가치를 지향하고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등을 극복하려 노력했지만 현실과 괴리되어 버렸다. 자연주의(naturalism)는 현세를 긍정하고 과학적, 실용적 지식을 추구했지만 역사와 문화는 경시했고 참된 가치를 정립하지 못했다. 실용주의(pragmatism)도 당시 교육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지식 교수(敎授)에 철저하지 못했고 지나친 낙관론으로 사회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저자는 실용주의 교육의 결과를 이렇게 표현한다.

"학생들의 흥미의 요구에는 부응했을지 모르나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근본 법칙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학생들의 변덕에 승복했고, 학생들은 깊이 있는 공부 없이 멍청한 상태에서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진보주의(progressivism)는 획일적인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비판하고 창의성과 자발성, 문제해결력을 중시했지만 지(知)적 성취의 가치를 간과했고, 학생의 욕구와 장기적 이익의 관계에 관한 숙고가 부족했으며, 협동만을 강조해 우수한 소수(少數)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했다. 본질주의는 진보주의가 사회과학만 중시한 데 반발해 그 외의 것만을 중시했고, 항존주의(perennialism)는 지적 훈련만 강조해 정서적, 도덕적, 신체적 중요성을 놓쳤으며, 재건주의(reconstruction)는 진보주의, 본질주의, 항존주의를 부분적으로 수용, 비판하는 절충적 자세를 취했지만 재건의 주체도 문제였고 절충주의에서 오는 혼란과 무질서에 빠졌다.

13가지 교육철학을 모두 소개하지는 않겠다. 이미 언급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답답하다. 이런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이 필요한데, 세상은 엉뚱한 것들만 절대화하고 우상화할 뿐 하나님은 외면한다. 그러다 부작용에 휩싸이면 새 길을 찾아 나서는데, 이번엔 절대적인 것은 없다며 무신론적 상대주의로 점프한다. 이미 혼란이 예비된 길이지만 절대적 진리이신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이런 길을 가고야 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중세시대처럼 교회가 교육을 담당할 수는 없다. 중세 교회는 착각에 빠져 진리까지 억압했다. 학문의 자유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잡힌 교육자들의 영향력 없이는 이 표류의 역사를 멈출 수 없다.

최휘운 독서논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