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설교
들리는 설교

장주희 | 이른비 | 240쪽 | 14,500원

설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라고 생각한다. 설교자로서 가슴에 사무치는 말씀이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없다면, 그는 설교자라 할 수 없고 설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펴고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받아 말씀을 선포하고 대언하고 있는지 점검하게 된다. 설교자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과 논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과 구원을 전하는 자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설교라는 것은 단순한 말하기와 스피치가 아니다. 어떤 기교와 기술과 방법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강연과 연설과는 차원이 다르다.

설교는 사람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고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도 아니며, 정치적인 목적과 사람을 모으기 위한 선동도 아니다. 거룩한 설교가 그러한 인간의 수준으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면해야 하는 설교 시간이니, 설교자와 청중은 그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고, 방법 또한 적절해야 할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신(新)설교학이 대두되고 강조되면서, 청중에게 감동이 되어야한다는 점 때문에 강단이 변질되고 약화된 점이 있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설교자는 강단에서 울든지 웃든지 쇼를 해서라도 청중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의 본질과 핵심을 알지 못한 채, 청중 중심의 사고에서 야기된 말일 것이다. 물론 신설교학에서 강조하는 것들 중에서도 취할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전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들리는 설교’라고 하니, 설교의 전달과 기술과 방법에 대해서만 강조한 책인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두 가지 면에서 저자에 대한 오해를 벗을 수 있었고, 설교자와 설교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는 목회자들에게 청중과 회중을 생각해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목회자는 설교와 설교자에게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을 위한 배려를 고려하면, 그 시간에 아름다운 하모니가 연출될 수 있을 것이다.

신설교학이 등장하면서 청중에게 감동이 되고 마음에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런 점은 보수적인 설교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교훈과 유익이 되었다.

그래서 청교도 설교를 연구하는 자들에게, 이런 가르침은 개혁주의 설교학에도 있었던 점이라는 것을 발굴해 소개되기도 했다. 최근 조엘 비키의 <설교에 관하여>라는 책도, 종교개혁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체험적인 설교가 무엇인지 소개하고 강조한 ‘설교학의 교과서’이다.

뿐만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즈도 설교에 있어 마음의 감각과 미적 작용에 관심을 갖고 청중에게 적용한 사람이다. 그동안 개혁주의가 청중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일방적인 선포만 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고 개혁주의에서도 설교에서 있어서 선포와 함께 상호교통과 교감에 많은 연구가 있었다.

무엇보다 설교 시에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라는 전적인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필자가 저자를 높이 평가한 점은 단순히 설교의 전달과 기술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설교를 위해 설교자가 먼저 메시지에 푹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의 속도와 억양과 톤과 제스처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직접 받은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그 감동으로 심령이 채워지고 젖어있을 때 모든 말과 행동이 자연스러워질 수 있고 공감이 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청중 사이의 커뮤니케이터이다. 설교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시간이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처럼 말을 하는 시간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나팔수이고 전령자이고 대리자일 뿐이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잘 전해야 하는 심부름꾼이다.

이 지위와 역할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만하고 우쭐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부르심을 기억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중간자로서 하나님의 심정과 메시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가’를 말해야 하는데 ‘거’를 말한다면, 의사불통이 일어난다.

청중과 공감하고 한 곳을 바라보며 같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서로 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전달자의 책임일 것이다. 설교자는 위에 있는 자가 아니라 중간자이다.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내야 하는 확성기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저자는 스피치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패턴으로 설교자를 훈련시켜서 동일한 설교자를 만들지 않는다. 그 설교자가 가진 장점과 단점이 있기에, 그에게 맞는 자신만의 설교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가 외모를 성형하여 바꿀 수 있고 자신감을 줄 수 있듯, 저자도 말을 성형해 전달이 더 명확하고 간결하며 적절하게 들려질 수 있다고 가르쳐 준다. 그 길에 있어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책의 장점이다.

설교자의 목소리와 발음과 성량은 그에게만 있는 고유 영역이다. 일반 스피치에서 가르치는 획일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나운서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니고 연설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런 기준은 설교자의 정체성을 더 약화시키고 전달자와 중간자로서 더 방해가 되고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설교자가 자신의 특별한 위치와 역할에 맞게 자신의 원석을 잘 다듬어 그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가도록 안내한다. 저자가 말하는 8단계를 따라가 보면 설교의 전달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필자는 설교자로서 청중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설교가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설교를 할 때 욕심을 내서 과하게 표현을 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만큼, 나에게 주신 은혜만큼 전달하려 하고, 모든 사람에게 들려지게 하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포한다.

설교는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시간이지만, 청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막는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뒤집으려는 마음으로 설교를 해서는 안 될 것이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의 백성들에게 잘 전해지기만을 소원하며 집중해야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설교와 설교 준비 시 청중에게 들리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은 하나, 과도하게 청중에게 맞추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설교는 청중이 듣고 싶은 것과 그들이 소원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를 보여주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청중의 관심과 욕구에 맞추는 것은 ‘설교의 변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깨닫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더 집중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먼저 흔들리고 감동되고 변화돼야 할 것이다.

반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청중의 대상과 수준과 위치는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한다. 그런 것 없이 청중에게 들어야 하고 알아야 될 말씀이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은혜도 안되고 역효과가 될 것이다. 청중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전달을 발달시킨다면 설교 시간은 큰 공감과 울림이 있을 것이다.

책을 보면서 선포자의 자리도 생각해 보았지만, 회중석에 앉아있는 내 모습도 생각해 보았다. 회중석을 을의 위치가 아니라 귀한 음식을 그에 걸맞는 그릇으로 전달받아야 하는 자리로 인식한다면, 우리의 설교는 더 가치있고 위대한 사역이 될 것이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