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모처럼 제대로 된 잠을 푹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하고 상쾌합니다. 모처럼 휴식을 취하면서, 오후 3시에 만날 친구와 수다를 즐기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집 근처를 지나 지름길을 들어서는데, 얼마 전 가게를 오픈한 식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픈 축하 꽃다발에 쓰여 있는 글귀를 보고, 너무 우스워 길을 가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하루 종일 그 글귀가 머리에 떠올라, 여기에 적어 봅니다.

“돈 세다 잠들게 하소서!” 또 하나는 “배 사장 돈 세다 잠들 때 불러라!” 정말 돈에 환장한 사람들 같아 보이시지요?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내심 기분 좋아지는 문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방학을 맞아, 예전 장애인 돕기를 위해 폐휴대폰을 수거하러 다니던 길을 추억하여 걷기로 했습니다. 구포에서 지하철 만덕역을 경유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등산길에 올랐습니다.

복지관을 떠나 만남의 광장인 산 정상을 걸어 올라가던 중, 약수터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문구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여기에 옮기면서 주님의 무한한 용서를 배우게 됩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용서는 단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베풂이자 사랑이다(달라이 라마).”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러면서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용서와, 예수님의 용서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베드로가 범죄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횟수를 질문한 것은 마태복음 18장 15-20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1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강조하신 것은, 형제가 자신에게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계속해서 용서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용서는 인간으로서 최대 한계점을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무제한적인 것입니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용서를 말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마 18:3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님의 공로에 기초한, 무조건적 행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오직 그 때에만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확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용서의 개념은 횟수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횟수와 상관없이,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아마 예수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부성 질문’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게시판에 있던 달라이 라마의 글귀는 아마 베드로의 일곱 번의 용서보다도 한 단계 낮은 말씀이 아닌가 싶지만,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함께 공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용서하신 방법은 그와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용서와 긍휼, 그리고 무한하신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용서
▲ⓒPixabay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에 대해선 늘 관대하기를 희망하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한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필자도 산행을 즐기는 가운데, 이웃에 대해 용서하지 못했던 일들이 심히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숲 속에 높이 솟아오른 편백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내음과 사방에서 뿜어대는 맑은 공기, 그리고 겨울에도 피어난 꽃들의 향기와 함께, 오랜만에 젖어 보는 용서에 대한 힐링으로 인해 지난 일들이 후회로 돌아옵니다.

연신 코와 입으로 숨쉬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성지곡 유원지 호수에 다다랐습니다. 호수 주위에서 필자를 기다리는 벤치에 앉아, 눈부시게 일렁이는 물결을 보며, 따스하게 비추이는 햇살의 정겨움을 마음에 담습니다.

추위를 물리친 동장군의 노랫소리가 반짝반짝 춤을 춥니다. 물결 위를 향해 쏘아대는 평화스런 호수의 낭만은 오랜만에 찾아온 필자를 환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선물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그 사랑을 흠뻑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주셨건만, 우리 조상들의 죄로부터 시작된 탐심과 교만으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친구들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주님 앞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지, 어린이대공원에 어린아이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 몇 명만 보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봄을 기다리는 놀이공원을 보니, 주인공들이 찾아올 봄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숲 속에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아우르는 산새들의 청아한 노랫소리는 천혜의 자연 속에서, 더 깊고 깊은 주님의 용서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친구들을 용서하거라! 그리고 모든 이들을 긍휼히 여기거라! 서로 사랑 하여라!” 하고 웃으면서 우리 귓가에 찾아오셔서,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여전히 용서하지 못할까요? “주님! 잘못했어요” 하고 죄를 시인하는 사람에게 용서해 주신다고 했는데, 잘못을 뉘우치거나 반성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는 왜 용서하지 못할까요?

2020년, 이제는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그 마음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멘!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