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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린도전서 9장 26-27절

방향을 잡지 못하면 방황한다

청소년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합니다. ‘질풍노도’란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라는 뜻입니다.

‘질풍노도’는 청소년기의 격동적인 감정생활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청소년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주변인으로 자기 정체성을 이제 막 확립해 가는 시기라,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이 나타납니다.

또한 청소년기, 사춘기 시절의 아이들을 럭비공에 비유를 합니다. 럭비공은 타원형으로 생겨서 땅에다가 튕기면 어디로 뛸지를 모릅니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은 방향을 잡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으니 방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방황이 계속되면 안 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방향을 잡지 못하면서, 방황은 계속됩니다. 방황은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 끝낼 수 있습니다. 때로 방향을 잡고도 그 방향을 망각해 버리면 방황할 수 있지만 그 때마다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 됩니다.

나침반이 방향을 잡아준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은 정확하게 남과 북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길을 찾으면 됩니다. 수시로 변화는 사막에서는 지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침반입니다.

비행기의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관제탑입니다. 만일 관제탑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종사는 이륙과 착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아직 인생 가운데 방황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방향을 제대로 잡고 방황을 끝내셨습니까? 여러분에게 있어 인생의 나침반이요, 관제탑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00m 달리기를 하는 선수에게 있어, 그의 방향은 결승점입니다. 결승점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세계에 제일 빠른 우샤인 볼트라 할지라도, 결승점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여 달려가면 메달을 목에 걸 수가 없습니다.

권투선수가 시합을 하는데, 그 주먹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상대편 선수를 향해야 합니다. 얼굴을 공격하든 가슴을 공격하든 옆구리를 공격하든 그 방향은 상대 선수를 향해야 합니다. 만일 주먹의 방향이 상대편을 향하지 않고 허공을 향하고 있다면 그 선수는 상대편의 주먹을 맞고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방향을 잡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인생의 방향을 잡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계속 방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방향은 먼저 나를 향해야 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7)”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바울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전하고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바울은 말씀의 방향이 남에게도 향해야 하지만, 먼저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 후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놓고 그 말씀 앞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바울이 말씀의 방향을 자신에게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방향을 잡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인생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 백성들의 인생의 방향은 누구를 향해 있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바로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 자신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방향이 온전히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방향은 목표다

방향은 목표입니다. 목표가 정확하지 않으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크게는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하고, 1년의 목표가 있어야 하고, 한 달의 목표가 있어야 하고, 하루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없으면 대충 대충, 되는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 기억납니다. 그 때는 운동에서 야구를 하면, 선을 그어서 야구 경기장을 그려야 했습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나름대로 선을 똑바로 긋는다고 그었는데, 선이 비뚤 비뚤합니다. 제 마음이 비뚤어서 그런 것일까요? 저는 분명히 똑바로 긋는다고 그었는데 선이 똑바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목표점이 없이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선은 내가 똑바로 선을 긋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목표점을 바라보고 그 목표점을 향해서 선을 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선이 비뚤 비뚤 하지 않고 똑바로 그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분명한 목표가 없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헤매이게 됩니다. 인생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방황을 하지 않습니다. 헤매이지 않습니다.

물론 때론 어떤 유혹에 의해, 때론 긴장을 늦추어 방황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기에,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독 이야기

어느 날 미 해군 함대에 주최한 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해군 제독이 가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해군 제독의 계급장이 실수로 훼손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해군 제독은 이대로 사열을 받을 것인지 아닐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참모들을 불러, 대장 계급장을 찾아보게 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대장 계급장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혹시나 싶어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선내 방송을 통해 대장계급장을 가지고 있는 병사가 있으면 가져오도록 공지했습니다.

방송을 했지만 대장 계급장이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방송을 한지 10분도 채 안 되었을 때 이제 막 임관한 소위 한 명이 숨을 헐떡거리며 대장 계급장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해군 제독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일개 소위가 대장 계급장을 왜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그 이유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소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소위로 임관할 때, 국가를 위해 헌신하여 꼭 대장의 지위까지 올라가라는 의미로 사랑하는 애인이 선물한 것입니다. 저는 이 계급장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며 제 의지를 다잡곤 합니다.”

이 소위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독입니다. 이후 제독의 이름을 딴 미 항공모함이 건조될 정도로 대단했던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는 원래 목표했던 4성 장군을 넘어, 미 해군 최초의 5성 원수가 되어 미국 해군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장군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목표 너머의 목표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준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목표 너머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꿈 너머의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은 단순히 목표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목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원하는 꿈과 목표를 이룬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고 내 영광만 드러났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어성경에 보면, 푯대가 목표(Goal)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목표 너머의 목표, 꿈 너머의 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방향은 중심입니다

방향은 중심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심이 잡혀 있지 않으면 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걷기 시작할 때, 많이 넘어집니다. 넘어지는 이유는 아이들이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배울 때가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잡기입니다. 외줄타기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잡기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외줄타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한 순간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궤도 이탈을 할 수 있습니다.

오뚜기는 넘어져도 언제나 다시 일어섭니다. 멀리 집어던져도, 한참 비틀거리다가 다시 일어섭니다. 그 이유는 오뚜기 아래쪽에 무게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게중심이 없다면 오뚜기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 설수가 없습니다.

배에도 평형수가 있습니다. 평형수는 배를 운행할 때 배의 무게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배의 밑바닥이나 좌우에 설치된 탱크에 채워 넣는 바닷물을 말합니다. 평형수가 있기 때문에 배가 좀 기울어져도 다시 제자리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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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 가운데에도 무게중심이 필요합니다. 그 무게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세상은 무게 중심이 돈이 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권력과 힘이 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의 중심을 잡아 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도 균형을 잃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궤도 이탈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넘어졌을 때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중심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목사인 저도 성도들의 마음의 중심이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나 정확하게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이새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 가운데 기름을 부어 왕을 삼도록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서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맏아들인 엘리압을 보자마자,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던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껍데기를 보시지 않습니다. ‘척하는 신앙’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믿음 좋은 척, 예배 잘 드리는 척, 기도 많이 하는 척, 신앙 좋은 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알려면, 그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을 때를 보면 됩니다. 중심에 주님을 모신 사람은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 나갑니다. 비록 흔들릴 수 있지만 중심이 바로 잡혀 있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를 찾습니다.

이에 반해 중심이 바로 잡혀 있지 않은 사람은 넘어집니다. 쓰러집니다.

방향은 시선이다

방향은 시선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선의 중요성에 대해서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님께서 이런 글을 써놓으셨습니다.

“지금 바라보는 것, 시선이 문제다. 시선 처리에 따라 인생의 길이 달라진다. 시선은 항상 어딘가로 향해 있다. 시선이 멈추면 걸음도 멈춘다.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 일이 벌어진다.

바라보는 것이 현실이 된다. 시선은 선택이다. 처음에는 내가 바라보지만 나중에는 보는 것에 내가 지배를 당한다. 시선이 고정되면 다른 것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인생은 보는 전쟁이다. 보는 것이 힘이다.”

인생은 보는 전쟁입니다. 사람이 어디 하나에 시선이 고정이 되면 다른 것이 끼어들 공간이 없습니다.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규현 목사님은 시선에 대해 강조하시면서, 시선은 결국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있으면 그 욕망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곧 욕망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합니다.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 욕망이 있는 사람의 시선은 모든 것을 돈하고 연관해서 바라봅니다.

주님께 시선이 고정되어야 한다

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안겨다 주는 효자 종목은 양궁입니다. 활을 쏘아야 하는 양궁 선수는 과녁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살은 허공을 향해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시선도 주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곁눈질하면 안 됩니다. 찬양 중에 ‘시선’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 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네.”

이 찬양 가사대로, 우리의 모든 시선이 주님께 고정될 때 하나님을 느끼기 시작하게 됩니다. 내 삶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우리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자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서는 단순해야 한다

시선을 고정한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초점을 잘 맞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점을 잘 맞추기 위해서는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기 위해, 단순해져야 합니다.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 가지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가지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가지치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가지를 잘 잘라내면 됩니다.

하지만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가지치기는 자신의 몸을 잘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고통이 수반됩니다.

어린아이의 삶은 단순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될수록, 삶이 복잡해집니다. 복잡한 나의 삶을 가지치기를 해서 단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비록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온전히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 이야기

교회 세습의 문제로 시끄러운 한국교회에 커다란 감동을 주시는 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인 이재철 목사님이십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13년 동안 100주년기념교회를 목회하고, 네 명의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시고 은퇴하셨습니다. 은퇴 후 거창군 웅양면에 있는 산중턱 마을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고 계십니다.

이재철 목사님께서는 2018년 11월 18일 추수감사주일,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설교 내용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의 떠남은 여러분들이 저를 버림으로써만 완결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재철을 버리시되, 적당히가 아니라 철저히 버리셔야 합니다. 이재철을 크게 버리시면 버릴수록, 하나님께서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을 통해 거침없이 내려주실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더 크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마지막 고별설교에서 성도들을 향해 “이재철을 버리되 철저하게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이재철 목사님 자신을 향한 시선은 완전히 거두고, 후임 공동담임목사님들에게 시선을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후배 목사들에게 언제나 본 되셨던 분일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존경받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 목사님이시기에, 비록 은퇴를 하시지만 그 후에도 성도들의 시선은 이재철 목사님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고, 이재철 목사님은 마지막 떠나는 고별설교에서 이재철을 철저하게 버려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결국 이재철 목사님이 자신을 버리고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에게 시선을 향하라고 하신 것은 곧 예수님께서 시선을 고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방향이 방황을 끝낸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이 제대로 잡히면,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을 향해 나가면 됩니다. 방향은 목표입니다. 방향은 중심입니다. 방향은 시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우리가 걸어갈 때, 방황을 끝낼 수 있습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