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C: 더 벙커
▲2018년 한국 영화 흥행 부진의 대표 사례로 지목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PMC: 더 벙커》.

상상과 사실성: 사실적이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은 한국 영화

영화 <마약왕>은 송강호와 배두나의 출연과 <내부자들> 우민호 감독의 연출로, 《PMC: 더 벙커》는 2013년 <더 테러 라이브>로 기대를 모은 김병우 감독과 배우 하정우의 조합으로, <스윙키즈>는 '연기파 아이돌'로 자리매김한 도경수(엑소 디오)와 <과속스캔들>, <써니>의 강형철 감독이 손잡아 쌍끌이 흥행이 예상됐으나, 세 작품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뒀습니다. 세 작품은 모두 한반도의 최근 역사에 기반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새해를 맞아 <극한직업>과 <내안의 그놈> 등 가벼운 코미디 영화, <말모이>처럼 역사에 기반했지만 최근 정치적 이슈들과는 관련 없이 따뜻한 감정을 전하는 영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영화평론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의외로 흥행에서 부진했던 2018년 한국 영화들의 원인을 돌아보고, 한국 영화의 스토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합니다.

영화와 사실성: 현실과 비현실의 절묘한 공존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영화이론을 개진한 장-루이 보드리(Jean-Louis Baudry)는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들의 심리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속 죄수들과 비교해 설명한 바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영화관의 관객들과 동굴의 비유 속 죄수들은 상당히 유사한 심리 상태를 갖고 있다. 비유 속 죄수들처럼 몸이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점만 다를 뿐,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를 감상하는 그들의 마음은 허상 속에 마음을 빼앗긴 죄수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보드리의 분석 내용이다.

그런데 비유 속 죄수들과 관객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도 존재한다. 비유 속 죄수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동굴 밖으로 나가본 적 없고, 동굴 벽면에 투사되는 장면들 역시 그림자 인형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림자 인형극은 동굴 밖 실제 세계의 모상인데, 그것도 대단히 흐릿한 그림자 수준의 왜곡된 모상이라서 도저히 그로부터는 진정한 존재의 진리를 알 수 없다.

플라톤은 죄수들이 이 사실을 알아내려면 올바른 철학의 도움이 필요한데, 거의 모든 죄수들이 벽면의 장면에 마음을 뺏겨 올바른 철학의 길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반면 객석에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은 자신들이 조작되고 편집된 허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개략적으로 알고 있다.

어떤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는지, 영화의 개략적 시놉시스가 무엇인지 상당부분 알고 영화를 감상한다. 영화 제작자들에게는 이 점이 큰 난관으로 작용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영상이 허상인 줄 아는 이들을 몰입시켜야 한다는 점이 매번 고민으로 다가온다.

영화에의 몰입,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첫 번째 방법은 영상이 허상인 줄 알지만 도저히 허상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만치 개연성 있고 치밀한 서사와 연출을 선보이는 것(드라마, 스릴러, 공포, SF)이다.

이 경우 관객들은 순도높은 감정이입의 상태에 빠지고, 그 영상이 실은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하고 편집한 뒤 특수효과를 가미한 허구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스스로 잊게 된다.

두 번째 방법은 영상이 허상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가운데, 그 허상이 실은 현실의 특정한 실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담았다는 것을 일관되게 제시하는 것이다.

주로 유별난 소재를 다루면서 과장된 연기,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선보이는 영화들(코메디, 액션, 슈퍼히어로)이 이런 방식을 따르는데, 이 경우 관객들은 영상이 유발하는 감정의 동요에 휩쓸려 반강제적으로 영화 내용에 몰입하게 된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
▲올해 개봉예정작, <어벤져스: 엔드 게임>의 프로모션 이미지. 사진 한 장 만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스펙터클함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대표 시리즈라 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 내에 이 두 가지 방법이 함께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한 가지 방편만 채택할 때보다, 관객들을 영화의 내용에 몰입시키기 더 힘들 수 있다. 왠지 서사가 현실 같아 스토리에 몰입하는 중인데 '뜬금없이' 등장하는 유머나 패러디가 영상의 허구성을 일깨워 감정이입의 흐름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2018년 한해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들 중 관객을 충분히 몰입시킬 만큼 양측의 방법을 적절하게 활용한 영화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타들의 겹치기 출현은 그 배우의 이전 작품을 생각나게 하면서 영상이 허구적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속 일깨우고, 연기력이 부족한 아이돌 출신 배우들의 등장 역시 영상이 이루어내려 하는 현실 재현의 노력을 좌절시켰기 때문이다. 서사 또한 치밀한 복선 사용과 궁금증 유발에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작비 100억원 이상이 들어간 기대작들의 경우 절반 이상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했는데, 이제는 민족감정을 고취시키는 서사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뿐더러 연출이 치밀한 사례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여기에 더해 서사와 연출에 보이는 허점을 흐름에 맞지 않는 개그나 연애장면으로 채우려 하다, 순간순간 관객들이 원하지 않는 시점에 영상의 허구성이 노출되는 경우도 자주 목격된다. 그 결과 대다수 고예산 영화들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거나 겨우 넘기는 수준에서 흥행을 마감하고 말았다.

영화와 상상: 아예 현실적이거나, 아예 초월적이거나

그러고 보면 우리 민족의 상상력과 문화적 역량의 한계가 바로 여기까지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통상 우리는 문화적 역량의 순위로 따져볼 때 한민족이 지구상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하는 민족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왔다.

그리고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여러 방면으로 세계최초의 순위를 차지하는 문화재들(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 활자본 직지심경, 세계 최초의 로켓 신기전 등), 오늘날 K-POP(케이팝)이 이룬 대규모 문화콘텐츠 수출국 지위 등은 이런 가르침을 입증하는 사례로 제시되곤 한다.

그런데 영화계에서 제작되는 서사 중심 콘텐츠들 대부분은 세계 최상위권의 문화국 위상에 걸맞지 않는 허술함을 보인다. 이는 유독 영화계만 여타 문화 분야에 비해 뒤떨어져서일까? 아니면 투자가 부족해서일까?

투자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에 비하면야 투자 금액의 규모가 초라해 보이지만, 전 세계 영화시장 현황을 본다면 한국의 영화 산업 투자 규모는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한국 영화의 소비시장 규모도 만만치 않다. 2018년 현재 규모만으로 따지면 세계 6위권을 차지하고 있고, 올해는 인도와 영국을 넘어 세계 4위권으로 올라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영화 소비시장도 크고, 이 소비시장을 노린 투자규모도 큰데, 왜 한국영화는 K-POP과 드라마에 못미치는 하품(下品)의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을까?

 

영화 시장 규모
▲한국 영화 소비 시장 규모, 2016년 현재 세계 6위를 기록하고 있다.

신학과 종교문화 연구자 관점으로 볼 때,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는 한국의 폐쇄적이고 협소한 문화적 시야, 둘째는 이 협소한 문화적 시야를 정당화해온 폐쇄적 종교성이다.

한국은 엄밀히 말해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까지 문화적 국제화와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3면이 바다로 가로막힌 반도지형에, 육로 접경국이라고는 중국과 일부 북방 유목민 국가들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근대화 이전 한민족에게 최고의 문화란 중국 문화뿐인 것으로 여겨졌다. 조상들은 이 중국 문화를 힘껏 모방한 까닭에, 스스로 최고의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민족이라 믿었다.

중화사상의 핵을 이루는 편협한 자민족 중심주의가 한민족의 정신과 문화에 그대로 이식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화 이후로는 식민지 시기와 냉전을 겪으며 지정학적으로 고립돼 제대로 된 문화적 국제화를 이룰 수가 없었다.

전통적 유교 문화 역시 이런 문화적 고립 상황을 부추겼다. 유교 사상의 최고 이상은 진정한 군자들이 통치했다고 전해지는 요순시대 농경국가 체계로의 회귀다.

한국에서는 이 이상을 벗어나는 모든 개방적이고 이질적인 문화 및 종교전통이 수백년간 거부당하고 멸시받아 왔고, 그 결과 한민족에게는 초월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이상향으로의 복귀로 고착되고 말았다.

한국 영화, 그리고 중국 영화가 유독 노골적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데는 이런 종교문화적 이유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도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작품을 제작하곤 한다. 그렇지만 한 해의 대작영화 대부분을 연달아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으로 도배하는 국가는 필자가 보기엔 한국과 중국뿐이다. 여기에 비견되는 사례는 시오니즘을 강조하는 이스라엘 영화뿐이다.

이유는 명료하다. 애초에 유교 자체가 종교적 초월 개념을 이상적 정치체제의 회복으로 제시했고, 그 이상적 정치체제는 폐쇄적인 씨족적 농경사회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시성
▲한민족의 정치적-민족적 이상(자주 번영)을 반영한 2018년 고예산 영화 <안시성>.

실제로 2018년 개봉된 한국 고예산 영화들(제작비 100억 이상)의 면면을 살펴보자. 총 14편 가운데 8편(<인랑>, <안시성>, <신과 함께2>, <공작>, <창궐>, 《PMC: 더 벙커》, <스윙키즈>, <명당>), 즉 절반 이상이 한반도의 민족적, 정치적 이상을 반영하는 작품들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초월의 최대치라는 게 결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주 번영과 남북 화합 정도라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드라마 제작업계의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다. 정치 성향이 옅은 여성 시청자라는 우군을 확보하고 있어, 굳이 민족주의라는 문화적-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 작품들은 여성 시청자들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자극적 요소들(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연애,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불륜, 음모, 배신 등)이 어우러져,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다채로운 서사를 선보이고 있다.

영화 얘기로 다시 돌아와 보면, 한국에서 흔히 '해외 영화' 카테고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 곳곳에 서구 종교문화의 기원인 기독교 사상을 반영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기독교는 그 시초부터 국제적이고,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종교성을 표방했다. 주후 1-2세기 당시 국제화의 심장이었던 로마 제국 한가운데서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 명령을 받은 기독교 신자들의 정신은 그 한계를 모를만큼 진취적이었다.

당시 열두 사도들의 전도여행 경로를 보면, 기독교의 개방적 진취성이 어느 정도인지 손쉽게 알 수 있다. 사도 도마의 경우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외지(外地)였던 인도에까지 전도여행을 가서 순교를 당할 정도였다.

열두 제자 전도여행
▲사도들의 전도여행 경로. 기독교 종교문화의 개방성과 진취성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기독교적 정신을 담은 종교문화는 민족과 문화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기독교인들은 인간 자체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추구했고, 전 인류가 어떻게 하면 참된 종교, 참된 신앙을 알아 영원한 생명에 이를지를 고민했다.

이처럼 종교적 사고의 범위(전 인류)와 차원(내세뿐 아니라 영생까지)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했던 까닭에, 그리고 바로 그런 종교문화가 오늘날까지도 서구 및 미국문화의 기반을 다지고 있기에, 헐리우드 영화들이 간혹 엿보이는 서구문화∙백인우월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항시 전 인류적 차원의 미래와 운명을 바라보는 기독교 정신이 반영되었기에,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든 공감을 일으키는 치밀한 서사를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시나리오 작가들이 무조건 헐리우드를 따라갈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아쉬운 점은 국내 영화 투자자들과 제작자들이 구태의연하게 한국의 폐쇄적인 문화성향, 폐쇄적인 종교문화를 답습하면서, 정작 인간성 자체에 대한 이해와 초월의 참된 지평을 무시하는 서사들만 선호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에서는 참된 의미의 상상력이 발동할 여지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현세 너머의 실재, 곧 하나님과 내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수여된 힘이다.

초월의 지평을 오직 현세의 정치적-민족적 진보로만 가둬놓은 상태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온전히 발휘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한국 영화가 관객들의 감정이입과 몰입을 유도하는 데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 초월적이지 않은 민족주의적 이상을 초월의 실재로 제시하다 보니, 영상을 보고 그것을 초월하는 참된 인간현실, 참된 영혼의 실재를 느껴보기 원하는 관객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개연성을 갖출 때는 진부한 민족중흥과 화해의 현실만 보여주려 하고, 관심을 강탈할 만한 요소들을 내세우려 할 때는 정작 관심을 끌 만한 초월의 요소를 보여주지 못하기에, 관객의 감정이입을 성사시키는 데 실패하는 듯 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안에 대해 영화계의 반성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가 신앙을 위해 봉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평론자 입장에서, 아예 재미있게 현실적이거나 아니면 환상적으로 초월적이거나, 입장을 분명히 하는 서사와 연출로 무장한 국산영화들이 속히 다시 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버닝
▲2018년 작품성을 인정받은 한국영화로 손꼽히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 아쉬운 점은 이 영화의 서사 역시 미국의 거장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버닝>과 이를 개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고유의 서사로 참된 인간 현실과 초월을 그려내는 작품의 출현이 아쉬운 시점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