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바이어하우스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독일 개신교계도 피터 바이어하우스 교수(Peter Beyerhaus)의 별세를 애도하고 있다. 피터 바이어하우스 학회 측에서 보내온 독일 현지 신문 ‘idea’에 게재된 관련 소식을 소개한다.

독일인으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의 한 사람이면서, 저명한 성경적 선교운동의 주창자인 선교학자 피터 바이어하우스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피터 바이어하우스 교수는 독일 튀빙겐 근처에 있는 고마링겐(Gomaringen)에서 91세 생일을 며칠 앞둔 1월 18일 별세했다. 바이어하우스는 은퇴 후 ‘그리스도 중심적 고백신앙의 교회연합 운동’에 더욱 전념했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이 운동은 교파의 배경에 관계없이 고백적 신앙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아우르게 한다. 그는 여러 신앙고백적 대회에서 개신교회와 정교회 및 천주교회 고위급 대표자들의 모임을 이끌었다.

그 대회들에서 유럽에서의 잘못된 영적 발전과 이슬람 국가들에서 이뤄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에 관한 선언들이 결의됐다.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그가 제안하고 공동 기초자로 활동했다. 이 선언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 선교단체들의 신학적 기초가 됐다. 1974년에는 ‘세계 선교를 위한 로잔(Lausanne) 운동’의 공동 창시자가 되었다.

고백신앙 단체 회의를 위한 활동

독일 베를린 근처 호엔크레니히(Hohenkränig)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이어하우스는 박사학위 취득 후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남아공에서 베를린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후에는 남아공 나탈 주에 있는 우푸물로(Uphumulo, Natal) 루터교 신학대학 학장직을 맡아 일하였다. 그 후 독일 튀빙겐대학교(University of Tübingen)로부터 선교학 및 에큐메니칼 신학의 정교수로 부름받았고, 1997년 은퇴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72년부터는 독일 개신교회(EKD) 중 신앙고백적 기독교단체 협의회 신학위원회의 공동 창립자와 회장으로 일했다. 1978년부터 2009년까지는 국제 신앙고백적 기독교단체 협의회(IKBG)의 회장과 잡지 ‘Diakrisis(분별)’의 편집장을 역임한 뒤, 협의회 명예회장에 올랐다.

바이어하우스 교수는 스위스 바젤 독립신학대학과 한국 연세대,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TEDS) 등 국내외 여러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으며, TEDS에서는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벵겔하우스 제1대 원장

튀빙겐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1970-1974년 알브레히트-벵겔-하우스(Albrecht-Bengel-Haus)의 제1대 원장직을 수행했다. 튀빙겐에 소재한 벵겔하우스는 튀빙겐 대학교 신학생들의 영성과 신학을 지도하기 위해 독일 뷔르템베르크 지역의 경건주의 교회들에 의해 세워져 운영돼 왔다.

바이어하우스 교수는 공동 창립자이기도 하다. 마침 그가 세상을 떠난 그 날, 벵겔하우스 창립 5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는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근처 코른탈(Korntal)의 독립 선교대학(Freie Hochschule für Mission, 현재 Akademie für Weltmission) 학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일함

독일 복음주의 연맹(Deutsche Evangelische Allianz) 전 회장 롤프 힐레(Rolf Hille) 교수(하일브론 거주)는 바이어하우스에 대해 ‘idea’에 “확신에 찬 교회연합 운동가”라고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이어하우스는 루터교인으로서 평생 동안 성경의 진리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일했습니다. 성경과 신앙고백에 기초한 운동에 대한 그의 헌신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사역과 신학에 대한 그의 예리한 분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바이어하우스는 WCC의 여러 국제 회의와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WCC와 비판적인 토론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활동 덕분이었습니다.”

국제 신앙고백적 신앙단체 협의회 신학위원회 회장인 베르너 노이어(Werner Neuer) 박사(뢰르라하 근처 샬바하 거주)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바이어하우스는 선교학자로서 성경적-구원사적이며 삼위일체론적인 선교관을 주창하였는데, 이 선교관은 독일 1세대 선교학자들인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과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과 연결된 것이고, 그가 쓴 수많은 논문들과 그의 주저(主著)인 <그가 자기의 말씀을 보내셨다(Er sandte sein Wort, 1996)>에 나타나 있다.”

노이어 박사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튀빙겐에서 바이어하우스 교수의 마지막 조교를 지냈다.

많은 이들을 위한 은밀한 감독

국제 신앙고백 기독교단체 협의회 회장인 울리히 뤼스(Ulrich Rüss, 함부르크 거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국제 신앙고백 기독교 단체들은 협의회의 창립자요 개척자이신 분을 잃었습니다. 1966년 이래 그는 자유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화되고 시대정신에 입각해있는 신학, 즉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복음의 유일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을 근본적으로 대중의 견해에 순응시켜버린 신학에 대항하여 싸운 교회의 투쟁 전선에 앞장 섰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에서 자신과 신앙고백적 기독교 단체들을 파수꾼의 위치에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투적인 신앙고백자와 신학자인 그에게 단지 ‘친구’ 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앙고백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투쟁에서 방향 제시자와 돕는 자가 되었고, 과연 ‘은밀한 감독’(ein heimlicher Bischof)이 되었습니다.”

바이어하우스 가족

바아어하우스 박사는 스웨덴 출신 잉에게르트(Ingegärd, 89세)와 결혼해 64년간 해로했다. 신혼 가약(佳約)은 1955년 스웨덴 노르쾨핑(Norrköping) 근처 팅스타드(Tingstad)에서 맺었다.

두 사람은 1951년에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 학생으로 있으면서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자녀 다섯을 낳았다. 손주는 13명이며 증손주는 2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