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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후서 1장 12-21절


설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행을 가고자 하면 설렌다. 새로운 삶을 살기 때문이다. 신년이 되면 설렌다. 신년에는 작년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신년이 되면 기대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다. 즉 신년이 되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어떤 복을 받고자 하는가?’다.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은 일시적인 복이 아니라, 영구적인 복이다.

째째한 복이 아니라 넓은 복이다. 한계를 정한 복이 아니라 한계가 없는 복이다. 즉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다.

말씀은 가슴을 뛰게 한다

하나님의 복을 가장 잘 정리한 책이 있다. 신명기 28장이다. 1절부터 6절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이런 말씀은 읽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이런 말씀이 그대로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될 줄 믿고 하나님께 더욱 더 의지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신명기 28장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저는 특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복이 관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다.

젊을 적에는 창세기 1장 1절이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대한 말씀만 들으면 가슴이 뛰었다.

시편 18편 1절 말씀이 가슴을 뛰게 한다

40대부터 좋아하는 말씀이 있다. 시편 18편 1절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신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있다. 이 말씀은 삶을 통해서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올해 제 삶과 신앙의 방향성과 목표는 작년보다 한 차원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인격 수준, 영적 수준, 지적 수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정도 등을 한 차원 높이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 차원 높이는 삶을 살겠다고 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사람마다 가슴 뛰는 것이 있다. 친구 중 한 명은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가슴이 뛴다고 한다. 저는 2020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최근에는 책 《설교자와 묵상》출간된 뒤 가슴이 뛰고 있다. 하나님께 놀랍게 쓰시고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등에서 잘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슴이 뛰는 것이 다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아침마다 가슴이 뛴단다.

저는 지금 베트남에서 글을 쓰고 있다. 저는 글을 쓸려고 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비록 글을 잘 쓰지 못하고, 통찰력이 남다르지 않지만 책을 쓴다는 그 자체만으로 가슴이 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가슴이 뛴다

사람마다 뛰는 가슴이 다르다. 오늘 베드로는 과거 예수님과의 생활을 되새길 때 가슴이 뛰고 있다. 가슴 뛰는 것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핍박 중에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이길 수 있다고 격려한다.

당시 교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뛰기를 바란다. 베드로는 오늘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뛰라고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준다.

베드로가 첫 번째 한 말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다. 베드로는 영광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베드로에게도 들릴 만큼 장엄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그로 인해 무척 기쁘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감동과 감격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상상할 수 없다. 저는 청년 때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빛줄기를 본 순간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 빛이 제게 다가왔다고 확신이 들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내는 어릴 적 천사를 본 적 있단다. 그 감격 때문에 지금도 예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에 젖는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 잊혀 지지 않아 고난 속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영광스런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자기가 한 체험을 당신들도 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음성을 바라보라고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분명하게 고백한다. 세상에서 들린 것이 아니다. 이 음성은 하늘로부터 울렸다고 한다.

베드로는 이 음성과 영광을 본 순간 성경에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말씀보다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한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떠나려고 했던 사람도 자신이 들었던 음성과 영광을 보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따르라고 강력하게 권고 한다.

하나님의 음성과 영광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음성과 영광을 보면 막연하게 다가왔던 말씀이 어두움을 환히 밝혀주는 빛과 같이 된다.

빛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환한 동이 튼다. 아침 샛별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준다.

하나님의 음성과 영광을 본 순간 베드로는 감동이 넘친다. 이 모든 말씀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되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생활의 고난을 이기는 것은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을 받을 때다.

과거를 회상하는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또 다시 하나님 영광의 감격에 빠진다. 하나님의 영광이 벅차올라 가슴이 쿵쾅 뛴다. 마음의 감격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베드로는 가슴이 뛰었다. 지금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가슴이 뛰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가슴이 엄청 뛰어야 한다.

만약 말씀을 읽는데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이 내 안에 숨 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이 하나의 글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씀이 글자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내 안에 숨 쉰다면 마음이 주체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사랑에 푹 빠진다.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수많은 감동에 푹 잠긴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 생각이 묶여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자신의 생업에 생각이 잠겨 있다. 삶의 문제에 생각이 잡혀 있다. 당장 처리해야 될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

저는 지금 책 쓰기에 온통 마음에 빼앗겨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과 연결하는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푹 잠기고 있다.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감동에 붙잡혀 있다.

우리가 잡히거나 잠길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박준호 전도사는 2020년 작년보다 세 배 성장하겠다고 기도한다. 세 배 성장에 잡혀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 잡혀 있다.

세 배 성장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잡히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 책을 작년보다 세 배 이상 읽으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꽉 사로잡히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가슴이 저절로 뛴다. 박준호 전도사가 책을 읽으려 할 때마다 가슴이 뛸 것이다. 제가 책을 쓸 때마다 가슴이 뛴다.

책에 가슴이 뛰는 사람은 책에 가까이 나아간다. 책 쓰기에 가슴이 뛰는 사람은 책 쓰기에 나아간다. 말씀에 가슴이 뛰는 사람은 말씀 읽기 위해 나아간다.

사람에게 가슴이 뛰는 사람은 사람을 찾아간다. 하나님께 가슴이 뛰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말씀에 가슴이 뛰는 사람은 말씀 앞에 나아간다. 말씀을 읽는 순간 예수님을 경외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워하게 된다.

네팔 사람들은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

네팔 사람들은 히말라야의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히말라야 산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뛰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도움을 받을 대상이라고만 여기기 때문이다.

연초만 되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다윗은 시편 1편에서 복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복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은 쉽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된다. 복 있는 사람이 되면 복을 저절로 받게 되는 것이 영적인 이치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몸은 살아 있으나 영은 병든 사람과 같다. 아니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사람이다.

작가 최인호가 “난 환자로 죽고 싶지 않다. 작가로 죽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살고자 했다.

그리스도인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뛴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과 관계가 수동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뛰려면 말씀과의 관계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어야 한다. 만약에 능동적이면 이는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 교만이 뛰게 된다. 하지만 수동적이면 가슴이 뛴다.

베드로에게 체험한 것은 능동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수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오셨다(16절)고 고백한다. 베드로는 지극이 큰 영광 가운데 소리가 들렸다고 이야기한다.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17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성경 말씀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받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이야기한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베드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수동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제 곧 육신을 떠나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그것을 알려 주셨습니다(벧후 1:14)”.

신앙은 수동적이어야 한다. 주체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기본은 수동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는 철저하게 수동적이어야 한다. 이 수동적인 관계를 최상이라고 여겨야 한다.

수동적이면 경쟁하지 않는다

수동적이면 경쟁하지 않는다. 경쟁이 필요 없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인생 자체가 경쟁이다.’ 인생 자체를 경쟁으로 만들지 않을 방법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 수동이면 된다. 경쟁의 삶을 살더라도 상생의 경쟁을 하게 된다.

법률가요 뛰어난 포커 선수인 데이비드 어포스톨리코는 경쟁을 세 부류로 나눈다. 호전형, 경쟁형, 전략형이다.

호전형은 앞뒤 가리지 않고 눈앞의 상대를 어떻게든 이기려 한다. 경쟁형은 주변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전략형은 인간은 모든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최종 승리를 바라보고, 모든 과정을 조정하고 다듬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어포스톨리코는 전략형 인간만이 최종 승리를 거머쥔다고 말한다.

어차피 세상은 경쟁이다. 경쟁도 행복한 경쟁을 해야 한다. 행복한 경쟁을 하려면 전략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삶은 예수님 안에서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아둥바둥이 아니라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수동적이라고 여길 때 가슴이 뛰어야 한다. 만약 내가 주도적인 것을 최상이라고 여기면 우릭 가슴이 뛰지 않는다. 하나님의 분노가 일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선명하게 들어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선명하게 들어야 한다.

소리가 들릴 때 두 가지 상태로 들린다. 첫 번째, 희미함이다. 두 번째. 선명함이다. 선명하게 들리려면 하나님께 발을 ‘살짝 적시기’가 아니라, ‘푹 담겨져야’ 한다.

적시면 옷깃만 스치는 격이다. 하나님의 맛만 보게 된다. 하지만 담겨지면, 하나님께 푹 잠긴다. 푹 잠기는 순간, 예수님의 깊은 맛으로 가슴이 뛰게 된다.

하나님께 푹 담그면 하나님께서 음성을 선명하게 들려주신다. 희미한 음성이 아니라 선명한 음성이다. 선명한 음성이 들리면, 하나님과 관계에서 능동적인 삶이 되지 않고 수동적인 삶이 된다.

수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이끄신다

수동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끄신다.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이끄셨다.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에녹에게는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올리셨다.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노아는 온 인류가 멸망할 때 살아날 수 있도록 이끄셨다.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다윗은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으로 이끄셨다.

오늘 수동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베드로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수제자로 이끄셨다. 예수님과도 더 힘든 거꾸로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수동적안 삶을 살았던 바울은 온 인류를 정복할 수 있는 전도자로 이끄셨다.

어떤 것을 해도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남을 주기 위해서 해야 한다. 대부분은 자기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서 한다.

베드로는 고난은 하나님을 위해 받았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살았다. 우리는 오직 자기 위해 산다.

표어는 ‘오직 예수!’다. 삶은 오직 부의 축적이다. 삶은 자신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껍데기에는 하나님이 있다. 안에는 하나님이 없다. 껍데기가 하나님이 있으니 말만 하면 하나님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은 공부를 할 때도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한다. 적어도 남을 주기 위해서 해야 한다. 정도전은 남을 주기 위해서 공부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이왕 하는 것,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과 같이 해야 한다. 품 담겨진 공부를 해야 한다. 정도전은 ‘나라는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은 먹을 것이 하늘’이며, ‘정치란 무릇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민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나라 조선의 문물제도를 만들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도심의 기본을 설계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과 성 안의 동네 이름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시와 음악과 병법에도 능통했으며, 《불씨잡변》, 《경제문감》, 《조선경국전》과 같은 수많은 저술을 남긴 뛰어난 사상가였다.

이런 공부는 적시기가 아니라 담그기로 공부한 결과다. 한 나라를 세우고 체계를 잡을 수 있는 공부다. 이런 공부를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가슴 뛰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자기 가문을 위해 돈을 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 벌어야 한다. 그리고 남을 주기 위해 벌어야 한다. 그럴 때 삶에 감격과 감동이 있다.

‘적시기’ 공부가 아니라 ‘담그기’ 공부를 하라

자기를 위한 공부는 조금만 해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공부나 남을 주기 위한 공부는 엄청나게 해야 한다. 적시기 정도의 공부가 아니라 ‘담그기’만큼 공부해야 한다. 적시기 정도 공부를 하면 나오는 결과는 초라하다.

김병완은 ‘적시기’ 공부가 아니라 ‘담그기’ 공부를 했다. 3년 만에 1만 권의 독서를 해서, 다른 사람들 독서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전에 조선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500권의 책을 집필했다. 이는 책에 자신을 적시기가 아니라 담그기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신앙은 적시기 신앙이 아니라 담그기 신앙이다. 그의 담그기 신앙은 시편 23편에서 잘 나타난다. 1절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차원이 한 단계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인생은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신앙은 수동적으로 살아야 한다. 삶은 전략적으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을 가슴 뛰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 아는 사실이 있다.

“꽃이 꿀을 품고 있으면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벌들이 저절로 찾아간다.”

우리가 예수님께 담겨져야 한다. 담겨지되 푹 담겨져야 한다. 그럼 세상 사람들이 벌이 꽃을 저절로 찾아가듯이 예수님께 저절로 찾아온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뛰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늘 예배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뛰는 삶을 살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