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를 통해서 지나가십니다. 여행길에 지쳐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거기서 만나셨습니다. 그 여인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인생의 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지 않는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나온걸 보니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어서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여인인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그때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며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 말에 여인은 놀라움으로 반응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는데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은 누구신가, 다른 유대인들과 뭔가 좀 다르구나...' 이렇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 여인은 알고 보니 심히 목마르고 허기진 여자였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심한 공허함과 무엇으로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으로 결핍된 여자였습니다.

존재 자체가 결핍되어 있으니 잘해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가진 게 있어도 좋은 줄을 모릅니다. 누가 무엇으로 이런 여자를 만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자기의 허기와 목마름을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빼앗고 갈취해서 라도 목마름을 채워야 하겠지요. 살기위한 몸부림입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목마름을 해결할 대상을 만들면서 심하게 집착 합니다. 그 대상이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할 것 이라는 허상으로 그렇게 해서 채우고도 목이 마르니 또 가서 채우고를 반복하다 결국은 그 대상에게 잡혀 버립니다.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고 노예가 되면 아예 갇혀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사 61:1). 중독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다섯이 될 수도 있고 여섯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 져서 건져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과 잘못 엮이면 같이 힘들어 집니다. 주변사람들도 다 떠나갑니다.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치유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직면하게 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인의 목마름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여인에게 어떤 남자가 남편이 된들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목이 마른데... 누구도 채워 줄 수가 없는데... 어느 누가 그녀의 남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실상은 남편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자기의 심한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게 남편인 줄 알았습니다. 좋은 남편만 만나면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으로 자기를 직면하면서 남편이 자기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고백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무엇이 여인의 삶을 그렇게도 목마르게 했을까요?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요 4:22). 그 영혼이 본능적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목마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심하게 목이 말랐습니다. "이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어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주님,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싶습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도 주소서, 저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 께서 오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믿고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요 4:25). 그녀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배가 회복되니 그녀의 인생이 달라집니다(요 4:23). 남편 다섯 있던 여자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요 4:29).

내가 예배하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만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참 예배자 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 4:24)

이영은 목사(서울 마라나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