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Ben White on Unsplash
본문: 베드로후서 1장 5-11절


사람마다 ‘내일’을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

사람마다 ‘내일’을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내일 눈을 뜨지 않기를 원한다. 훈련병 때 힘든 훈련을 소화하기 버거워서, 내일 눈 뜨지 않기를 기도한 적이 많았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내일이 기다려진다. ‘내일’ 자신만의 꿈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은 ‘내일’이 기다려지는 사람이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이왕 ‘내일’을 사는 것 기다려지는 내일을 살아야 한다. 불만이 아니라 행복한 내일을 살아야 한다.

요즘 저는 내일이 기다려지는 삶을 산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할 일이 있으니 꿈을 꾼다. 꾸는 꿈은 아래와 같다.

내일은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내일은 어떤 사람을 만난 것인가? 내일은 어느 카페에서 글을 쓸 것인가? 등등이다. 소소한 것들이다. 책이 ‘설교자와 묵상’이 막 출간 된 뒤 내일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꿈에 포함되었다.

지금 베트남 달랏이란 소도시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 유명하다는 ‘크레이지 하우스’도 가보지 않았다. 제가 묵은 숙소에서 5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카페에서 책을 쓰는 것보다 ‘크레이지 하우스’가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책을 쓰는 것이 작은 꿈을 꾸도록 하고 있다.

지금 ‘공감’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저는 공감력이 많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내일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든다. 쓸 말이 없고, 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론 글이 잘 풀려지면 행복감이 넘친다.

어쨌든 공감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저의 삶에 꿈을 꾸게 해준다. 밝은 내일, 희망찬 내일이 될 줄 믿기 때문이다.

공감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일에 대한 기대가 이렇게 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대가 얼마나 클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일에 대한 기대가 넘친다.

글은 내가 쥐어짜서 써야 한다. 신앙생활은 내가 쥐어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으실 것만 기대하면 된다.

글을 한 챕터 한 챕터 써나갈수록, 내일 쓸 글이 기대가 커진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어떻겠는가? 더욱 기대가 클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한계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기대되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영적 성장이다. 신학생 때, 영적 성장을 위해 몸부림치던 때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가장 신앙생활이 맛있었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영적 성장을 그리워한다.

당시에는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면, 삶이 확 달리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리 큰 변동이 없었다. 단지 주님을 향한 그리움은 많이 커졌다. 사실은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큰 영적 성장이었다.

당시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꾸준히 영적 성장을 추구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싶었다.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영적 성장을 추구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영적 성장이 반드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이다.

오늘 베드로도 영적 성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성장의 단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적 성장을 이루려면 먼저 할 일이 있다. 첫 번째는 “더욱 힘쓰는 것(5절)”이다. 더욱 힘쓰지 않으면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에 “궁력거중(窮力擧重) 불능위용(不能爲用)”이란 말이 있다. 그 뜻은 “온 힘을 다해 무거운 것을 드는 사람은 그 다음에 힘을 못 쓴다”는 말이다.

무리하게 힘을 쓰는 것이 소용없다는 말이다. 쓸데없이 힘쓰지 말라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은 자기 그릇 크기를 알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 그릇에 맞게 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신앙생활에서는 다르다. 하나님이 무한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힘을 쓴 만큼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보답을 해주신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더욱 힘써서 영적 성장을 추구하라고 한다.

영적 성장을 하려면 절박함으로 무장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힘써서 해야 한다. 절박하지 않으면 힘써서 신앙생활하지 않는다. 그럼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니 절박함이 기본이어야 한다. 만약 땀을 흘린다면 짠내가 나도록 땀을 흘려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은 밍밍하다. 반면 힘겹게 산을 오르며 흘리는 땀은 짜다. 하나님을 위한 영적 성장은 짠내가 나는 땀을 흘려야 한다.

눈물도 마찬가지다. 값없이 흘릴 때와 절박한 마음으로 분투할 때 흐르는 눈물의 맛은 다르다. 절박함으로 얻은 결과가 설렁설렁해서 얻은 결과는 마음 자세도 차이가 크다.

정진홍 교수는 그의 책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절실하고 절박할 때 흘리는 눈물은 짜게 마련이다”라고 말한다. 눈물의 짜고 싱거움은 눈물을 흘리고 뿌리는 이가 겪어내는 삶의 절박함과 절심함에 달렸다.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성장한다. 절박하게 매달리면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을 추구할 때, 5절 말씀처럼 “더욱 힘써야 한다.” 즉 절박함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말은 영적 성장이 신앙생활이란 말이다. 만약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라 말하기 곤란하다. 그저 종교생활 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영적 성장의 8단계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영적 성장의 단계는 어떻게 되는가? 본문은 8단계로 이야기한다.

1단계는 믿음이다.
2단계는 믿음 다음에 덕이다.
3단계는 덕 다음에 지식이다.
4단계는 지식 다음에 절제다.
5단계는 절제 다음에 인내다.
6단계는 인내 다음 경건이다.
7단계는 경건 다음 형제 우애다.
8단계는 형제 우애 다음 사랑이다.

영적 성장의 목표는 8단계여야 한다. 만약에 8단계까지 영적 성장을 이루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것이다.

저는 약 10년간 집중적으로 독서를 했다. 독서 한 단계 성장하는 데 보통 6개월 전후 걸렸다. 설교자들을 가르칠 때 한 단계 성장하는 데도 6개월 이상 걸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영적 성장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절박하지 않은 상태로 하면 한 단계 도약 하는 데 시간이 무한정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성장이 중간쯤 가서 멈추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지막 단계까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마음을 갖느냐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지막 단계인 ‘사랑의 단계’까지 올라서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맛을 봐야 한다. 만약 맛보지 못한다면 불쌍한 그리스도인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 단계까지 영적으로 성장 가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독서를 하는 데도 절박함이 필수였다. 영적 성장에는 절박함에 절박함이 필수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내 단계에서 그칠 확률이 높다. 고난 견디는 것 쉽지 않다.

어떤 분이 자기 삶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더 이상 견딜힘이 없다는 것이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욥도 극한 고통을 겪자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하지만 욥은 절박함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결국 견딤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에 대해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결국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갔다. 견디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사랑으로 찾아오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뒤 자기 목숨을 아까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았다.

결국 영적 성장을 이루려면 절박함으로 장착되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최종 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이 어렵다.

각자 영적 성장 단계를 정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마다 영적 성장의 목표를 정해야 한다. 3단계가 아니어야 한다. 6단계도 아니어야 한다. 모두 8단계여야 한다. 즉 마지막 단계까지 가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8단계까지 가려면 명심할 말씀이 있다. 10절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의 뜻은 마지막 단계까지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데까지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데까지 영적 성장을 하는 것이다.

영적 성장의 목표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데까지” 가야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실족하지 않기 위함이다(10절).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11절).

영적 성장 중 명심할 것이 있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나의 굳은 의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럴 때 말씀에 의해 인도함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할 영적 성장의 단계란 무엇이 있는가? 영적 성장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적 성장의 단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사람이다. 돈의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이다. 즉 세상의 화려한 집이 아니라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구원론적인 믿음이 있다. 이것은 거듭나는 중생의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열매적인 믿음이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의 충성과 관련이 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단순히 ‘믿습니다’가 아니라, 삶이 세상 사람이 봐도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덕이다.

믿음의 사람은 하늘의 덕을 선전해야 한다. 하늘의 덕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세상 악이 아니라 하늘의 덕을 세우며 살아야 한다.

덕이란 단순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게 본이 되는 삶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 말씀과 같이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덕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있다. 독불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자주 목격되는 것 중 하나가, 다른 것들은 다 틀렸고, 자신만 옳다는 독선과 아집과 같은 모습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다양성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삶을 산다. 우리가 독선으로 무장하니 이단 등이 출현한다.

그리스도인은 덕을 세워야 한다. 덕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있다. 믿음은 자신에게 유익이 있다. 덕은 이웃에게 유익이 된다.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어야 진짜 삶이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내게 덕이 있으면, 사람들이 몰린다. 덕이 많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셋째, 지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말씀과 가까이 함으로 얻는 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다. 책과 친구처럼 지낼 때 얻는 지식이다.

둘을 모두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은총인 말씀과 일반은총인 책을 모두 소중히 여겨야 한다.

매년 연초가 되면 성경 몇 독 읽기를 결심한다. 이 결심이 말이 아니라 실천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세상의 지식도 많이 쌓아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무식하면 쓸데없는 것에 용감해진다. 쓸데없이 용감하면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무식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유식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세상은 지식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지식에는 조건이 붙는다. 그 조건은 하나님을 아는 데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지식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지적 무지는 자랑이 아니다. 영적 유식과 지적 유식을 무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많이 공부해야 한다. 더 나아가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넷째, 절제다.

제가 가장 잘 못하는 것이 절제다. 특히 분노에 대한 절제는 쉽지 않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맨 마지막에 있는 것이 절제다. 절제가 될 때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의 단계를 올라갈 때 고비가 절제다. 절제 고비만 잘 넘기면 그 다음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 말은 영적 성장 중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이 절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것이 절제다. 이 훈련만 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다섯째, 인내다.

초기 그리스드교의 위대한 신앙인인 크리스소톰은 인내를 “미덕의 여왕”이라고 했다. 주석학자 바클레이는 인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내는 손을 끼고 앉아서 단순히 어떤 것들을 참는 정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승리를 거둔 인내함이고 시련으로 인한 남자다움이 견고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확고부동함이고,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생활의 용기 있는 인정이며, 심지어 가장 나쁜 것을 더 나은 방법의 다른 단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일을 참기 위한 용기 있고 의기양양한 능력이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극한 상황을 통과할 수 있게 하고, 기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요한과 마가를 다루는데 있어, 인내가 부족했다. 반면 예수님은 제자들은 다루는데 탁월한 인내를 보여주셨다. 의심 많았던 도마와 십자가 앞에서 흔들렸던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에게 끝까지 인내하셨다.

고통 중에서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의 최고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밑바탕을 준비하는 것이다.

여섯째, 경건이다.

경건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경건은 범사에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은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한 자신과의 투쟁을 해야 한다. 투쟁을 하되 투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럴 때 범사에 유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일곱째, 형제 우애다.

행복한 가정은 형제 우애가 좋다. 아니 뜨겁다. 형제 유애가 좋은 집이 하나님의 집이다. 재벌들의 특징은 형제까지 싸우는 것이 당여난 것처럼 비췬다. 이는 형제 우애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모습이다.

여덟째, 사랑이다.

이는 영적 성장의 최고의 가치다. 사랑은 한 마디로 기독교의 가치를 말해준다. 사랑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맛을 보는 순간 사람이 달라진다. 인생에 전환점이 된다. 사랑은 세상을 살린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하나님 나라를 한 마디로 보여준다.

반드시, 영적 성장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장을 해야 한다. 도중 멈춤이 아니라, 끝까지 성장해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사람이 된다.

어떤 사람은 영적 성장의 중간만 가도 되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아니다. 끝까지 성장해야 한다.

자녀의 성장이 도중에 그치면 부모에게 근심거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영적 성장이 멈추면 하나님의 근심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끝까지 성장해 하나님께서 찍어주시는 도장을 받아야 한다.

끝까지 영적 성장을 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무용론을 들고 나올 것이다. 지금 세상은 무용론이 득세하고 있다. 정치 무용론, 협상 무용론, 재벌 무용론, 지도자 무용론 등이다.

고등학교에는 영어 무용론, 수학 무용론, 국어 무용론 등이 나온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교회 무용론, 지성 무용론, 성장 무용론 등이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영적 성장 무용론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에게까지 자라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기준을 달리하면 된다. 무용론이 아니라 유용론을 붙들면 된다.

철학자 니체가 하나님 무용론을 들고 나왔다. 그 사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유용론을 체험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놓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교회 무용론이 득세하고 있다. 교회 무용론으로 인해 가나안 교인이 급증하고 있다. 이런 무용론이 판을 칠수록 우리는 하나님 유용론, 교회 유용론, 기도 유용론 등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가 더욱 영적 성장의 중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영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영적 성장이 신앙생활의 답이기 때문이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