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크투 DB
본문: 요한복음 4장 3-6절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시려는 중입니다. 주님은 유대 땅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북쪽 지역인 갈릴리로 가셔야 합니다. 북쪽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주님은 그동안 왕래하지 않던 사마리아를 통과하며, 수가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사마리아의 수가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눕니다.

1. 경계의 벽을 허물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겠는지라(3-4절)”.

사마리아(Samaria)는 이스라엘에서 상당히 소외된 지역입니다. 남쪽 유대 사람들이 북쪽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은지 오래 됐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가 이렇게 소외된 지역이 된 것은 신앙적인 이유가 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종교적 순수성을 잃었다고 생각해, 상종하지 않게 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마리아는 이방인들과의 결혼으로 혼혈인이 된 것 외에도, 이방 문화의 우상과 결탁해 혼합종교를 만든 신앙의 변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려 합니다. 마치 우리의 DMZ와 같은 곳을 가시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한사코 요단강을 건너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추천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것이 지금까지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상례를 깨뜨리시고, 스스럼없이 사마리아를 통행하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경계의 벽을 허무려 하십니다. 우리도 삶에서 경계의 벽을 허물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2. 잘못된 선입견을 극복하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5절)”.

사마리아는 다른 인종간의 결혼으로, 더 이상 히브리 혈통을 지속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이 아니라는 선입견이 상존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사마리아 수가 마을에 당도하셨습니다.

바르비종 출신의 전원 화가 밀레가 이를 그림으로 그렸다면 ‘우물에 걸터앉으신 주님’으로 멋지게 그렸을 것입니다. 실로 주님은 많은 오해와 비난까지 각오하고, 사마리아를 통과해 수가 마을에 당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수가 마을에 도착하신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선입견을 타파하시려는 의도입니다. 직선 코스로 사마리아를 굳이 통과하신 것은 촉박한 일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사람들의 간청으로, 거기서 이틀씩이나 머물렀던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극심한 선입견에 매여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타파하려는 것입니다.

선입견은 인간 사회의 암적 병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각종 선입견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출신 지역, 학교, 가문 등 다양한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선입견은 타파되어야 할 무서운 병폐인데도,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입견에서 해방되는 만큼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3. 마음의 지경을 넓혀야 한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6절)”.

주님은 드디어 수가의 마을 야곱의 우물에 당도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믿음의 선조들이 대대로 대를 이어오며 살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주님은 야곱의 우물에 스스럼없이, 아니 보란듯이 걸터앉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의 지경을 넓히고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하십니다. 증오를 동반한 지역감정은 맹목적 파당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크지도 않은 작은 나라에서 우리는 지역감정으로 참 좁게 살고 있습니다. 선거 때마다 죽은 송장이 다시 살아나듯, 지역감정이 활개를 칩니다.

우리에게 지역감정은 실로 뿌리가 깊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옛 백제와 신라의 원형 그대로입니다. 유림의 붕당(朋黨)이나 학파(學派)가 이씨 조선 사색당쟁의 온상이었습니다. 이 지역감정은 치료되기 어려운 영원한 우리의 마음의 빗장인가 봅니다.

이 배타적 지역감정은 비단 우리뿐 아닙니다. 신사의 나라는 영국도 그렇습니다. TV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축구 경기를 하면, 스코틀랜드인은 프랑스를 응원할 정도입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

지역감정은 복음서에도 뚜렷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만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의식하고 기록했기에, 사마리아 이야기는 한 줄의 기록조차 없습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이제 마음의 지경을 넓히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지경을 넓힌 만큼, 넓은 세상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경계의 벽을 허물며 살게 하소서! 잘못된 선입견을 극복하며 살게 하소서. 마음의 지경을 넓히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경계의 벽을 허물고, 선입견을 극복하며, 지경을 넓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