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자력으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구조되는 것도 ‘구원’이지만, 분초롤 다투는 경각(頃刻)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구원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내고 소경, 중풍병자, 문둥병자를 고친 것은 전자에 해당하고, 홍해와 바로의 군대 사이에서 진퇴양난을 겪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고(출 14:10-28),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은 것은(민 21:9) 후자에 해당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에서의 구원은 이 두 개념을 모두 담지 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심판’에서, ‘종말론적 급박한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종말론적인 급박한 심판’이라 함은, 죽음에서 맞닥뜨릴 ‘개인의 종말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맞이할 ‘역사적 종말 심판’의 불예견성(不豫見性)으로 말미암는다.

◈예수 이름을 불러 얻는 급박한 구원 방식

종말론적인 급박한 구원을 말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아마 다음 구절일 것이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0-21)’”.

사도행전 2장 17-20절에는 윗 구절을 포함해 ‘말세’를 지칭하는 문구가 세 번 등장하며(17, 18, 20절), 이 말세의 구원의 도리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름”을 제시한다. ‘말세’라는 종말론적 상황과 ‘구원’을 함께 엮었다.

여기서 ‘말세’는 예수님의 구속 완성으로(요 19:30) 더 이상 역사의 존속 의미가 없게 됐다는 ‘완성적 종말(end)’ 개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뜻에서이다.

후자의 경우, 혹자는 생의 종말에 직면한 절체절명의 사람에게는 타당해 보이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앞날이 창창한 사람은 자기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데,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 받는’ 종말론적인 구원 방식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고 한다.

그러나 이 구원 방식은 초대교회 때나(아니 구약시대 때, 창 4:26; 13:4; 21:33) 지금이나 보편적이고 유일한 구원 방식이다. 죄로 전적 무능해진 죄인은 그에게 100년이 주어진다 해도, 그 시간들을 자기 구원에 유용(有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구원에 기여할 것이 전혀 없는 절체절명의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는 찬송가 가사에서 보듯, 기독교의 구원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는 것에 비유된 것은 절체절명의 인간 처지를 말한 것이다.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누구가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 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찬송가 258장)”.

익사 직전의 사람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사람 살려”라고 소리 지르는 것뿐이다. 금방 숨이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외의 어떤 행위도 불가능하며 또한 무의미하다.

전적 무능한 종말론적인 심판에 직면한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외에,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주의 이름을 불러 얻는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인가

이신칭의자들은 사람이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말을 자주 하며,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 믿어 낙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예를 곧잘 든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이들 중에는, 그런 말은 너무 진부하며 구원을 싸구려로 만든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 배후에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자기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미 앞서 언급했듯, 죄인에게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그 적절한 예가 천사가 물을 동하는 시간에 먼저 연못에 들어가기만 하면 치유받을 수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중풍병자이다. 연못가에 기거하기에 누구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갈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으면서도, 38년이라는 시간을 허송세월했다(요 5:1-7).

죄로 전적 무능해진 인간에게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도, 그 시간이 자기 구원에 기여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앙의 연조가 쌓인다 해서, 반드시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믿었을 때의 순수한 신앙과 열의를 다 잃고 퇴보한다.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교회가 그 경우이다(계 2:4).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신앙인이었다가(계 3:15),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성숙해지고 신앙의 큰 진보를 이루는 이들도 있다(마 21:30).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가 구원받은 것은, 신앙의 진보를 이룬 그 신앙으로가 아니라 처음 복음을 받은 그 신앙으로서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도 예외가 없다. 그가 구원받은 것은 순교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미숙하지만 복음을 처음 영접했을 때의 그 신앙으로서이다.

하나님은 처음 복음으로 택자를 부르실 때, ‘완전한 구원에의 부르심’으로 부르신다. 불완전하게 불러 완전케 하시지 않는다. ‘단번에 정결케 하여(히 10:2, 9, 14), 성도라 일컬음을 받게(고전 1:2)’ 하셨다.

성도들에게서 부족함과 유치함이 발견되는 것은(가라지는 논외로 치고), 그들의 구원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미성숙해서이다.

어린아이의 경우를 보자. 그는 미성숙하지만, 결코 불완전하지는 않다. 그들이 성숙해짐은 불완전한 인간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의 완성이 아니다. ‘미성숙한 완전한 인간’이 ‘성숙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하여, 그의 구원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는 ‘구원받은 미성숙한 신자’일 뿐이다. 바울 같은 대(大)사도도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고(롬 7:18)’, 나아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라며 자신의 미성숙과 죄를 한탄한다.

누가 그런 바울을 두고 그의 구원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는가? 물론 그의 이런 탄식은 하나님 앞에서 보다 더 성숙해지려는 갈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럼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역시 우리처럼 하나님의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도 우리처럼 오직 ‘믿음의 의’만 의존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도를 닦듯이 자기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출발부터 완전하다. ‘칭의의 열매’인 ‘성화’는 ‘불완전에서 완전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완전에서 완전에로’ 나아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폼새가 익사 직전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처럼 폼이 안 나지만, 그래도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다.

선지자 이사야는 시온(천국)에 이르는 노정(路程)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치 못한 자는 지나지 못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사 35:8)”.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고 천국 노정(路程)에 발을 들여놓을 때, 이미 구속을 받아 깨끗케 됐음을 천명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 믿고 천국 노정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아직 완전히 깨끗지 못했는데, 점차 천국을 향해 나아가면서 깨끗해지다가 천국 입성할 즈음 예수님 비스무리하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 예수를 영접할 때, 그는 이미 거룩케 된 채로 천국에의 노정 곧, 시온의 대로(시 84:5)에 발을 들여놓았다. 깨끗케 되지 못한 자는 결코 시온의 대로(시 84:5)에 들어설 수 없다.

이는 ‘천국’과 ‘시온의 대로’는 그 재료가 같기 때문이다. 천국에의 노정은 ‘완전한 거룩’을 입은 자가 ‘더 완전한 거룩’에로 나아가는 여정(旅程)이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처음부터 완전함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부르는 주의 이름이 완전한 구원을 갖다 주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 자의로, 내 종교적 열심으로 부르는 것이 아닌(마 7:21-23) 성령의 능력으로 부르기에(고전 12:3), 반드시 구원을 일구어낸다.

정확히 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복음을 통해 구원에의 부르심을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에(롬 10:13-17, 살후 2:14, 계 3:20) 화답하여 내는 소리이다.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시니, 양(羊)인 우리는 ‘음메’ 하고 소리 내는 것이다. 양(羊)인 성도는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음메’ 하며 따라가다가 천국에 도달한다.

누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 얻는’ 하나님의 경륜을 얕잡아보는가? 구원을 주시는 그의 이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시라(빌 2:9-11)! 그리고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받으라!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