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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전서 5장 7-14절


기준을 정해야 한다

삶은 기준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기준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도 신앙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신앙의 기준은 말씀이다. 저도 삶의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뜻 이룸이다.

사람 사귀는 데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꿈은 큰 사람이어야 한다. 저도 사람을 사귀는 데 기준이 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사람 사귀는 데도 기준이 있어야 하듯이 사람 평가에도 기준이 있어야한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사마천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을 세웠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불우했을 때 그가 어떤 사람과 친하게 교류했는가?
-부유했을 때 그가 누구에게 베풀었는가?
-고위직에 있을 때 누구를 등용했는가?
-궁지에 몰렸을 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지는 않았는가?
-가난했을 때 탐욕을 부리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기준을 세운 이유가 있다. 현재 위치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를 알기 위함이다.

사람은 잘 나갈 때, 잘 나가지 못할 때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제가 힘들 때 주위에 도움을 청한 적 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당시 혼자 인생의 쓴 맛을 보아야 했다. 그 쓴맛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다 들어주려고 애를 쓴다.

저도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첫 번째 기준은 성실한가의 여부다. 두 번째 기준이 절박함이 있는 가다. 아트설교연구원 운영에도 기준을 세우고 있다. 특히 2019년 9월부터는 아트설교연구원 참여자의 기준을 강화했다. 그 이유는 알토란과 같은 설교자를 키우기 위함이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목요모임에 참여하려면 2번의 면접과 6개월 인턴 공부 과정을 거쳐야 한다. 6개월을 공부한 뒤, 성실성과 절박함 등으로 평가해 모임에 계속적으로 함께할지를 정하려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이 있다

사람만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는 것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기준을 세워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이 잇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사람은 일상의 삶이 중요하다. 더 중요한 때는 위기 때 어떻게 사는가? 이다.

2019년 4월 강원도 고성에서 큰 산불이 발생했다. 산불이 발생하면 대응 단계에 돌입한다. 대응단계는 1단계부터 3단계까지가 있다. 그 때 초속 30m가 넘는 강풍 때문에 화재 발생 1시간 반 만에 최고 대응태세 3단계를 발령했다.

이 단계가 발령되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소방차들이 총출동하게 되어 있다. 상황에 맞는 대응 기준 때문에 산불의 크기에 신속하게 진화해 큰 피해를 막았다. 대응 단계의 기준에 따른 행동으로 여의도 축구장 크기 800배 정도를 태웠지만, 집 125채 타는 것에 그쳤다.

군대에 있을 때, 군인 복무 규칙이 있었다. 공무원이나 직장인도 그에 따른 근무 기준이 있다. 이와 같이 세상도 세워진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 한 개인의 삶도 각자마다 세운 기준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관계된 신앙생활은 더욱 기준이 명확하고 엄격하게 세워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삶의 자리에 있다. 즉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 그리스도인은 이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 베드로가 일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7절)” 이는 우리가 세상 것으로 인해 염려에 빠져 살기 때문이다. 나아가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고 한다. 이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명백해야 한다. 세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물신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성도의 관심은 ‘옆’인 세상이 아니라 ‘위’인 하나님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위’예 계신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럼 왜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옆’이 아니라 ‘위’여야 하는가? 삶과 신앙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옆’인 세상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옆’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위’다. 그러므로 ‘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위’에 계신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한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대미를 다음과 같이 장식한다.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11절).” 할렐루야!

세상의 삶의 결론은 명백하다. 하나님의 무궁함이다. 결국 우리 삶의 기준은 ‘아래’나 ‘옆’이 아니라 ‘위’여야 한다.

저는 설교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를 종종 한다. 강의 중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인문학을 하다 보면 인본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지 않느냐? 다.

그럴 때 이렇게 답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위’를 바라보며 사는 신앙으로 인해 도리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 또한 당신들은 말씀을 맡은 목사이므로, 결코 인본주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왜 그런가?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아래’나 ‘옆’이 아니라 ‘위’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위’를 바라보는 신앙만이 답을 준다

오늘 베드로는 말한다. “주께 맡기라(7절)”, “믿음을 굳건히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8절)”.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위’를 바라보는 신앙만이 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말씀은 삶의 답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너무 잘 안다. 대부분 본능에 충실하다. 이익 추구에 엄청 영리하다. 본능에 충실하므로 ‘위’를 바라보지 않으면 반드시 ‘옆’이나 ‘아래’를 향하고자 한다. 그리고 ‘옆’이나 ‘아래’ 것을 의지한다.

그리스도인은 옆을 의지하면 안 된다. 그럼 베드로의 말처럼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 베드로의 권면처럼 염려거리가 생겼을 때 주께 맡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준은 반드시 ‘위’여야 한다. 기준이 ‘위’가 아니면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때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지 66년 만에, 낙태죄를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이는 ‘위’를 보지 않고 ‘옆’만 보고 내린 결정이다. ‘옆’만 보고 결정을 내리니 논란을 불러왔다.

여성계와 의료계는 환영한다. 하지만 종교계는 반대한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이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다.

여성계는 ‘대박’이란 말과 함께 환호를 질렀다. 한 쪽은 탄식과 함께 이는 말도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젠 국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 판결 내용을 살펴보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 판결이다. 말을 못하는 태아의 생명 존중권은 무시되었다.

저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명 문제는 ‘옆’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위’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좋다. ‘위’의 기준이 존중받지 못하면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옆’이 기준이면 서로가 불행해진다

삶의 기준이 ‘위’가 아니라 ‘옆’이였던 결과 한 사람의 운명이 불행했다. 바로 길고 긴 고난의 삶을 살았던 요셉이다. 요셉의 형들은 ‘위’를 보지 않고 ‘옆’만 보다가 요셉을 돈 몇 푼 받고 팔아버렸다. 마치 가롯 유다가 돈 몇 푼 받지 않고 예수님을 판 것과 같은 이치다.

요셉의 형들이 ‘위’를 보지 않고 ‘옆’을 보게 된 것은 아버지 영향이 크다. 야곱이 ‘위’가 아니라 ‘아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형들도 ‘위’가 아니라 ‘옆’을 보았다. 아버지가 ‘위’를 보지 않으니 아들들도 ‘위’를 바라보지 않았다. 결국 형들이 동생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아넘겼다.

형들이 ‘위’를 바라보았다면, 동생이 미워도 팔기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심이 ‘위’인 하나님이 아니니 ‘옆’만 바라보았기에,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했다.

‘옆’만 보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한다. 하지만 ‘위’를 보면 절대로 할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도 ‘위’를 보지 않았기에 원죄를 지었다. 삶이란 내가 보고 싶은 것 보는 것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시는 것 보는 것이다. ‘옆’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다. ‘위’를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럴 때 하지 않을 행동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살아야한다. 예수님은 ‘옆’을 보지 않으시고 ‘위’를 보고 행동하셨다.

십자가란 ‘위’를 본 행동의 절정을 보여준다. 만약에 ‘옆’을 생각했다면 십자가에 달리자마자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살 길을 찾으셨을 것이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님을 살리고자 했다. 예수님께서 ‘옆’을 봤다면 죽을 위기에서 살 기회를 포착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를 보고 죽음을 선택하셨다.

반면 빌라도는 ‘위’를 보지 않고 ‘옆’을 보았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바 둘 중 한 명을 살려야 할 때 민란이 두려웠다. 즉 ‘옆’을 보았다. 결국 민란이 두려워 바라바를 놓아주었다(마27:24).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나는 죄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최악의 죄인으로 여기셨다. 주기도문을 통해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을 고백한다. 그 고백에서는 발리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단정한다.

‘위’를 구하는 삶은 세상 것의 최소한만을 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삶을 살든 ‘위’를 보고 살아가는 삶이다. 저는 10년 독서 기간에 오직 ‘위’만 바라봤다. ‘위’만 바라보기 위해 한 가지만 기도했다. “하나님, 밥만 먹여주세요.”

‘옆’까지 봤으면 하나님 전셋집도 주세요, 가족도 책임져 주세요라고 함이 마땅했다. 하지만 ‘위’만 바라보았기에 최소한만 구했다.

우리는 가능하면 ‘옆’을 보고 살고자 한다. ‘옆’을 볼 때 인생의 답이 나온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옆’을 보는 순간 실수가 기본이고, 실패는 투성 이가 된다.

삶이 어려울지라도 ‘위’에 계신 하나님만보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본받는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옆’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면 마태복음 15장 14절 말씀처럼 맹인과 같은 삶을 산다.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반대로 ‘위’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면 요한복음 11장 40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가 된다.

인생은 답이 없다

카피라이터 박웅현은 그의 책 《여덟단어》에서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팁을 이야기한다.

첫째, 인생에 공짜 없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루하루가 쌓여서 언젠가 내 인생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논어》에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무능야(不患人之不己知 患其無能也)’라는 말이 나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는 뜻이다. 즉, 하루하루를 준비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는 말이다.

둘째, 인생은 마라톤이다.

그는 마라톤과 같이 인생을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셋째, 인생에 정답은 없다.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한다. 하지만 긴 인생에는 정해진 정답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저는 여기서 세 번째를 지목하고자 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맞다. 인생은 정답이 없다. 단지 정답자인 하나님만 있을 뿐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위’가 아니라 ‘옆’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에는 정답이 있다.” 그 이유는 정답자이신 하나님을 기준삼아 살아가기 때문이다. 즉 ‘위’를 바라보는 사람의 인생에게는 삶에 정답이 있다. 하나님이 인생의 정답을 주시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하나님께》라는 책을 쓴 한재욱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인문학은 명답이고 성경을 정답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오답이다.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정답이시다. 그러므로 오답을 갖고 있는 ‘옆’을 바라보고 살 것이 아니라 ‘정답’울 갖고 계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왜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셨는가? 하나님만이 정답이시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도 베드로가 외쳤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왜 이렇게 외쳤는가? 하나님께서 인생과 영혼의 정답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 문제에 답이 되신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염려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의 온갖 염려를 맡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럼 왜 하나님뿐이신가? 하나님은 우리 염려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울면 부모가 해결해 준다. 해결 받는 순간 울음이 그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염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시면 문제가 해결된다.

세상에는 바라볼 ‘옆’의 것들이 아주 많다. 바라보고 싶은 ‘옆’의 것들로 넘쳐난다. ‘옆’은 문제가 있다. 금방 질린다. 그리고 금세 지친다.

왜 금방 질리고, 금세 지치는가? 시간이 흐르면 힘들고 쇠진해지기 때문이다.

전에 순천에서 초청 강의가 있었다. 강의를 한 뒤 예약되어 있던 광주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들과 광주로 넘어가 식사와 대화를 했다.

모두 마친 뒤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자마자 완전히 뻗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긴장된 하루를 보낸 결과를 말해준다. 사람은 힘들면 지치는 것이 당연하다.

‘옆’의 것들과 시간을 보내면 지침이 기본이다. 하지만 ‘위’를 보고 하면 힘은 들지만 기쁨이 넘친다. 그 날도 하나님을 위한 강의였으므로 힘이 펄펄 넘쳤다. 하나님께서 남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빼앗아 가는 세상, 공급하시는 하나님!

세상은 나의 힘을 빼앗아간다. 하나님은 내게 새 힘을 공급해주신다. 우리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한 결과를 만들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힘 있게 살기 위해서라고 ‘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 정답, 삶의 아름다운 결과, 인생의 축복된 길을 만들어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옆을 바라보다가 실패하는 인생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통화 중, 응답 중, 행복 중”

‘통화 중’이란 말이 있다. 전화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매번 ‘통화 중’이다. 그럼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언제나 통화가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응답 중’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언제나 ‘통화 중’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응답 중’이시다.

어떤 사람은 전화를 한 뒤 한 참 만에야 반응이 온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느 때든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신다. 언제나 ‘응답 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화중인 인간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응답 중이신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응답중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신호음 중’이어야 한다.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연결중인 상태여야 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기도하면 하나님과 ‘연결중’이 된다. 그 다음 ‘응답중’이 된다. 결국 삶과 신앙생활이 ‘행복중’이 된다.

성령의 불로 불타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위를 바라보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뜨거운 마음의 불을 피워야 한다. 마음의 불이 피워지면 결국 성령의 불이 피워진다. 하나님이 계신 ‘위’를 바라보고 살려면 성령이 불로 타올라야 한다.

웨이처치 담임 목사인 송준기 목사의 책 《크리스천 생존수업》이 있다. 그 책에는 내 믿음을 지키는 12가지 생존술을 이야기한다.

그 중 첫 번째 생존수업이 바로 ‘불 피우기’다. 사람은 불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 불은 강원도의 산과 집을 불태운 빨간색 불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불이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영적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불이 임했기 때문이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8-40).”

어릴 적, 불을 피우려면 성냥을 켜야 했다. 성령의 불을 피우려면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럼 위로부터 하나님의 불이 임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관심인 ‘위’를 보고 살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답이 없는 ‘옆’이 아니라 답이 있는 ‘위’여야 한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우리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삶의 정답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