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지극히 높은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비천한 십자가에 강하(降下)하셨다(빌 2:6-8). 소위 지상(至上)에서 지하(至下)에로의 극락(極落)이다.

이런 하나님의 반전(反轉)이 어떤 이들에겐 구원이 되고 어떤 이들에겐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야기한다.

성경은 이러한 혼란을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지도록 하려는(고전 2:9-10)’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일환으로, 또는 택자와 불택자를 가르는 삼위일체 계시의 분수령이라고(요일 5:20) 말한다.

◈비천한 십자가에서만 만나는 하나님

지상(至上)의 하나님이 십자가로 극락(極落)하심은 하나님께로의 접근이 엄금된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조우할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구약의 속죄소(施恩座, 출 29:42)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십자가를 예표 한다.

선지자 이사야가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사 57:15)”고 한 것은, 지고하신 하나님이 비천한 십자가에서 죄인을 만나주신다는 예시이다. 마르틴 루터(M. Luther)의 말대로, 십자가는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곳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죄인 된 분수를 모르고, 십자가에서가 아닌 하늘 지성소(至聖所)에 올라 직접 하나님을 만나려 했다. 그렇게 하려니 자신들의 율법적 의(義)가 필요했고, 그 의를 축적하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안간힘을 써야 했다.

당연히 할례(율법) 없는 이방인들은(삼상 17:36) 하나님에의 접근이 엄금돼야 했고, 율법을 가진 자신들 만이 접근을 허락받은 지구상의 유일 민족이 되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획득했거나 지성소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기껏 ‘더러운 옷(사 64:6)’ 같은 죄인의 의(義)만 창출하고, ‘하나님의 의’에는 불복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롬 10:3). 물론 하나님과의 조우도 실패했다.

저주받은 십자가에만 하나님이 머무실 수 있음은, 십자가만이 죄인에게 요구된 율법을 성취(롬 6:23, 갈 3:13)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 형벌이 아니면 죄를 속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죄가 절망적이고 저주스러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음부(陰府)에 누워 있는 비참한 죄인들을 십자가가 일으켜(엡 2:6. 골 2:12), 아들의 나라로 옮긴다(골 1:13). 이러한 사실은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은 저주받을 흉악한 죄인이라는 자각을 갖게 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영접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약간의 빛과 도움만 주면 자력 갱생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진 계몽주의자(illuminati, 啓蒙主義者)들은 흉측한 ‘십자가’와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 짓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님의 십자가 강하는 우리를 그에게로 올리기 위함

하나님 아들의 지상 강림은 종종 성경에서 천국 강림과 동일시됐다.

이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라며 자신의 강림을 천국 강림과 동일시한 예수님의 광야 외침에서도 파악된다. 이를 진전시키면, 장차 천국이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에 모셔질 것을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머무신 십자가가 바로 천국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죄인들은 십자가에서 천국을 경험한다. 십자가는 하늘 밖에서 하늘을 보게 하고, 하늘로 올라감 없이 하늘을 경험하게 한다.

야곱이 벧엘 광야의 꿈에서 본, ‘땅과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창 28:12)’도 십자가였다. 야곱은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며 장차 십자가에 하나님이 모셔질 것을 내다보았다.

어느 시대나 십자가 없이 천국을 보려는 자들이 넘쳐난다. 명상을 통해, 신비 체험을 통해 직접 천국을 엿보려 하는 신비주의자들, 철학자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을 모셔 내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죄인’을 ‘위의 천국’으로 끌어올린다. 야곱이 벧엘에서 본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 위에는 천사들이 ‘내리락(descending on a ladder)’만 하지 않고 ‘오르락(ascending on a ladder, 창 28:12)’도 했듯, 십자가는 하나님의 강하(降下)도 있게 하지만 죄인을 ‘위의 천국’으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죄인으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義)’를 획득케 하여, ‘위의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게 한다.

십자가는 높이 계신 ‘위의 하나님’을 아래로 모셔온 하강(下降) ‘델리베이트(delevator)’이고, 비천한 죄인을 ‘위의 천국’으로 올린 상승(上昇) ‘엘리베이트(elevator)’이다. 이렇게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높음’과 ‘죄인의 낮음’혹은, ‘하나님의 낮아짐’과 ‘인간의 높아짐’이 모두 공존한다.

예수님이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한 것은, 그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성도를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겠다는 뜻이다.

자력으로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죄인을 십자가에 실려 천국으로 올려 지게 하셨다. 오늘도 죄인의 마음에 모셔지고, 죄인의 입으로 고백된 ‘십자가 복음(롬 10:6-10)’이 죄인들을 하늘의 하나님께로 들어올린다.

◈십자가, 하나님의 영광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신다는 점에서, 십자가의 영광은 지성소의 영광이다. 루터가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칭송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데서 찾지 말고, 십자가에서 찾아야 한다.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십자가 신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뜻이었다.

십자가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현한다. 십자가가 전적 타락한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성자 하나님을 인간 구원의 유일한 공로자로 삼아 오롯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십자가에 강하(降下)하셨음은, 십자가 구원이 아니면 안 될 정도로 죄인이 절체절명의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했다.

사실 죄인이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 함은, 자기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죄인을 절망적 상황에 두는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오늘날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선 자기가 뭐든 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절체절명의 이런 인간 처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온 것이다. 구원에 관한 한 죄인은 유구무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 사랑에 돌리게 할 뿐이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이 되는 이유를(고전 1:18) 인간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적시하며,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케 하도록 하기 위함(계 7:9-12)”이라고 했다. 십자가는 우리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을 자각케 하여, 오롯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한다.

심지어 십자가의 구원을 받는 손인 ‘믿음’까지도 인간의 자랑이 깃들지 못하도록 ‘선물’이 되게 하셨다(엡 2:8). 인간으로 하여금 우쭐거릴 여지가 없도록 모든 인간의 자랑거리를 원천적으로 배제시켰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독점적인 은혜를 베푸시어, 오롯이 당신만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이다.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엄위함이여(사 42:8; 48:11)!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