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대표 이경섭 목사가 인사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하나님은 그의 택자들에게 유업(遺業)을 주셨으며, 그것을 오직 은혜(믿음)로 받게 하셨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

그 유업은 ‘의(義)’이고, 이 ‘의(義)의 유업(遺業)’은 오직 은혜로 수납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딛 3:7)”.

성경은 아브라함이 은혜로 ‘의의 유업’을 얻었고(갈 3:18, 29), 그와 그의 후손에게 약속된 ‘믿음으로 받는 복’도 사실은 이‘의의 유업’이었다(갈 3:8-9).

그리고 하나님은 ‘의’를 유업으로 주었을 뿐더러, 그 ‘의’에 따르는 약속들도 얹어주셨다. 은혜로 얻은 ‘의의 유업’을 마치 우리에게서 난 것처럼 여기고, ‘의’에 따르는 소산물들을 얹어주신 것이다. 그것들이 ‘영생’, ‘양자됨’, ‘천국’이다.

성경이 ‘의’를 언제나 ‘영생, 양자됨, 천국’과 연결 지움은 그것들이 ‘의’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의와 영생

영생은 ‘의(義)의 유업’에 따르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영생의 약속은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 ‘의의 유업’ 없는 죄인들에겐, 당연히 ‘영생’의 약속도 없다. 죄인이 영생을 소유하려면 반드시 죄에서 구속받아 ‘의의 유업’을 받아야 한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요 6:40)”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죄인이 아들을 믿어 의(義)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이 길 외는 영생 얻는 다른 길이 없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갖게 했다(딛 3:7)”고 했다.

그리고 죄인에게 있어, 영생을 얻게 하는 ‘의’는 반드시 ‘구속(救贖)의 의(義)’여야 한다. 성부 하나님께 ‘영생’이 있었음에도 반드시 성자 그리스도로 부터 ‘영생’을 취하게 하신 이유가(요 5:26, 요일 5:11) 여기 있다.

이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은 ‘구속의 의’없이는 ‘영생’을 얻을 수 없기에 아들의 구속의 의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그들이 영생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엄금하신(창 3:24) 이유도 죄의 구속을 받지 않은 그들에게 영생이 허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는 이에게 영생이 있다(요일 5:13)’고 한 것은 아들로부터 ‘구속의 의(롬 3:24)’를 입은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뜻이다.

◈의와 양자 됨

인간을 단지 피조물로 두시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는 것이 그의 태초의 원의(原意)였다(엡 1:4-5).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데는 하나님의 영적 DNA인 ‘의(義)’가 관건이며, 그 ‘하나님의 의’를 가질 때만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할 수 있었다(‘의’가 하나님의 ‘거룩’의 외면적 속성이라면, ‘거룩’은 그의 ‘의’의 내면적 속성이다. 둘은 불가분리이며 하나님의 핵심적 속성이다, 레 11:45).

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과 인간을 부자(父子) 관계로 만드는 공통분모이다. 무죄했던 태초의 ‘아담의 의(義)’가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은 이 ‘하나님의 의(義)’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아담이 선악과 언약에 계속 충성했더라도 그의 의는 무흠한 인간의 의일 뿐 그것이 하나님 아들의 지위를 약속해주지 못한다.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받지 않도록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는 ‘하나님의 의’를 가질 때만 아들의 지위가 획득된다. 율법의 의무 아래 있는 한 그는 ‘율법의 종’이다.

그러나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는 ‘하나님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있으며 인간의 힘으로는 획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어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지위(명분)을 얻게 했다(갈 4:4-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했다(엡 1:15)’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의 지위를 갖게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종(從)’에서 ‘아들(子)’로의 점진적 진화(進化)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종’과 ‘아들’은 그 근본이 다르기에, 다른 종(種)으로의 점진적인 진화(進化)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서로 다른 이종(異種)인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서로 종자(種子)가 다른 ‘종(從)’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서, ‘아들(子)’로 진화될 수 없다. 종이 아들이 되려면 근본 존재의 변환, 곧 거듭남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는 말씀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난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경은 우리가 첫 조상 아담에게서 잘라져 나와 두 번째 조상 그리스도께로 접붙임을 받아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환하는 것에(롬 11:17) 비유했다.

◈의와 천국

천국은 그리스도의 의로 통치되는 ‘의(義)의 나라’이다(사 32:1, 히 1:8). 성도는 그 ‘의(義)의 나라’의 ‘의(義)의 백성’이고, 그리스도는 ‘의(義)의 왕’이시다(히 7:2). 지상 교회가 종종 ‘의의 나라’로 일컬어짐은 그곳이 ‘의의 자녀’들이 모인 ‘천국’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의 나라’인 천국은 당연히 의롭게 된 ‘의인’만 들어간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의’로 다시 난 ‘의의 종자’만 들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 선지자 이사야도 ‘의인의 종자(種子)’로 거듭나지 못한, ‘혈과 육의 종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 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사 35:8)”.

그리고 천국 입성 자격으로서의 ‘의의 종자’로의 거듭남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 흉악한 십자가의 강도가 낙원에 들어간 것은(눅 23:43) 그리스도를 믿어 ‘의의 종자’로 바뀜으로서이다.

사도 야고보가 믿는 자들에게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한다고 한 것도(약 2:5) 같은 맥락이다.

결론적으로, ‘영생, 양자됨, 천국’은 ‘의(義)의 소산물’이다. ‘의(義)’는 성도들이 받는 모든 약속들의 머리이다. ‘의’ 없인 약속들도 없다. 우리가 먼저 주목하고 칭송해야 할 주제가 ‘의’여야 할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고 이 ‘의’가 그런 약속들을 열어주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난 ‘하나님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태초에 무죄했던 ‘아담의 의’보다 나은 의였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나중 나온 포도주가 처음 나온 포도주보다 더 탁월했듯이(요 2:10),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義)는 첫 번째 아담의 의(義)보다 비할 수 없이 탁월했다. 처음 것이 자연 발효된 것이었다면, 나중 것은 초자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비할 수 없이 나은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의 무한한 지혜 가운데 ‘아담의 타락’을 용인하셨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