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박사)가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횃불회관 화평홀에서 '교회와 정치'라는 주제로 제19회 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본지는 당시 발표했던 안상수(자유한국당)·이언주(무소속) 국회의원과 원희룡 제주지사의 발제문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샬롬나비
▲샬롬나비 제19차 학술대회가 진행되던 모습. (왼쪽부터 순서대로) 안상수 의원, 이언주 의원, 이일호 교수(칼빈대, 사회), 김철홍 교수, 임종헌 박사, 김성봉 교수. 원희룡 지사는 불참했지만 발제문을 보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진영 기자
머리말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 항의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크 성의 교회 문에 붙였습니다. 이 반박문은 독일 민중들을 계몽시켰고 종교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1669년 친구이자 동지였던 아드리안 콜바흐가 투옥되어 죽음을 맞이하자, 스피노자는 맹목적인 종교인들의 폭력으로부터 이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펜을 들며 17세기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등장합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기고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걱정하는 교회에서 세상이 걱정하는 교회 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교회의 문제가 사회에 많이 언급되었습니다. 특히 정교유착(政敎癒着) 이라는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정치와 종교에 대해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500년전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움직임과 스피노자의 자유주의 정치철학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 진단해보겠습니다.

1. 종교개혁

○ 종교개혁의 태동

종교개혁(Reformation)은 16~17세기 유럽에서 카톨릭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고자 일으켰던 운동을 말합니다. 이 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부르는데, 프로테스탄트는 '항거'를 뜻하는 라틴어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에서 유래된 말로, 이를테면 '카톨릭에 항거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프로테스탄트는 당시 온 세상을 점령하고 있던 카톨릭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며 사람들을 각성시켰습니다. 카톨릭은 배교자 프로테스탄트를 '이단'으로 간주해 처형하거나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카톨릭에 회의감이 든 사람들을 돌이키지는 못하였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많은 지역, 많은 국가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종교개혁을 벌이는 동시에 성경 본위의 믿음을 강조하며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기 나름의 교리를 정립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현재 개신교(신교, 프로테스탄트교회)라 부르는 여러 종파의 교회들이 그것입니다. 즉, 구교인 카톨릭과 신교의 분리는 종교개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다양한 교리를 가진 다양한 교파로 나눠지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 종교개혁가들

① 피터왈도

교회사를 살펴보면, 카톨릭에 최초로 반기를 든 사람은 12세기 프랑스의 피터 왈도(Peter Waldo)다. 그는 한때 카톨릭 사제로 고용돼 라틴어 성경과 신학서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성경대로 하자'는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왈도파'를 결성하여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왈도파에 가담하자 위협을 느낀 카톨릭은 그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급기야 신도들을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왈도파는 약 200년간 카톨릭의 박해를 받으며 산으로 피신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신도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끔찍했습니다. 1486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골짜기에 숨어 있던 2만여 명의 왈도파 신도들을 죽이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습니다.

② 마르틴 루터

이후, 1483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의 길을 닦은 마르틴 루터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484년 스위에서 울리히 츠빙글 리가, 1509년 프랑스에서 장 칼뱅이 태어났습니다.

법률가를 꿈꿨던 마르틴 루터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 앞에 떨어진 벼락을 경험한 순간 하늘의 무섭고도 은혜로운 힘을 느끼고 수도사로 전향한 일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하지만 성실한 수도생활을 하던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호화스러운 대저택, 음란과 돈으로 부패한 사제들을 목도하였고, 면죄부를 판매하며 신의 은혜를 매매하는 기존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문서를 게재하였습니다. 이후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혀 결국 성직을 박탈당하고 파문당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탄생하게 됩니다.

③ 울리히 츠빙글리

울리히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 대성장의 사제로 지내며 설교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만찬에 참석했다가 사순절에 육식을 하면 안 되는 규례를 어기고 소시지를 먹었다는 이유로 교구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츠빙글리 본인은 육식을 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을 변호하면서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단식규율이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지적하다가 카톨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④ 칼뱅

'루터가 시작했던 종교개혁을 종이 위에 담아내고 재발견한 사람은 칼뱅이다'
라는 평가를 듣는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뱅 역시 법학도에서 종교인으로 전향한 인물입니다. 철학적, 인문학적인 저서까지 출간할 정도로 학구적이었던 칼뱅은 개신교의 기본 정신과 교리를 체계적이고 명쾌하게 정리하며 체계화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습니다.

○ 개신교를 향한 카톨릭의 탄압

카톨릭에서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간 이탈리아의 트리엔트에서 3기에 걸쳐 종교개혁가들이 제기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카톨릭의 교리를 정의하였으며, 교회의 규율과 제도 개혁을 논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주장하는 교리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며 카톨릭만의 신앙과 교리를 확고히 하였는데 반종교개혁의 성과는 얻었지만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며 기독교적 보편성이 완전히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 트리엔트 공의회 주요 내용: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음을 내세워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였음. 믿음으로만 면죄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며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가지 성사(sacrament)만을 인정. 또한 신이 미리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부여한다는 예정설을 강조하고, 성모와 성인들에 대한 숭배를 폐지할 것을 주장)

공의회(카톨릭)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루터의 주장을 배격하고 그가 번역한 성경 부정.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a)를 공식적인 성서로 선포했으며, 성서와 성전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인정. 성서의 해석은 교회만이 가능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칼뱅파에 속한 프랑스 개신교(위그노)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던 콜리니 장군은 프랑스 정부를 도와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전하였고, 정부와의 화해모드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국왕 측은 프랑스 전역의 개신교도들이 파리로 모이는 날에 이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1572년 8월 24일을 시작으로 무차별 학살이 시작됩니다. 파리에 모였던 개신교도들을 학살한 이후 집과 상점들을 불태웠고, 살육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면서 1개월여에 걸쳐 수만명의 개신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 종교개혁의 한계

① 루터파의 농민운동 및 유대인의 대한 자세

루터의 종교개혁 시기에 맞추어 봉건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중 농노제 폐지, 교회세 경감, 봉건 부담 경감 등을 외쳤던 농민전쟁은 가장 큰 규모의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이들을 '기독교가 아닌 자들'이라고 외치며 규탄하고 영주들이 농민군을 진압하는 쪽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루터는 영주 지배층의 옹호를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루터파 교회가 지배층의 영향 아래 놓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시대적인 한계에 기인하겠지만 유대인들의 삶의 기반을 박탈하고 추방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해 당대 유럽인의 반유대인 인식을 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② 카톨릭과 유사한 운영방식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며 일어났던 루터파 교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위주의적인 법을 만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운영 방식은 약간 달랐지만, 지배하는 교직자 계급과 지배를 받는 평신도로 나눈 교회의 기본적 구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처럼, 시간이 지나자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도 세상의 일부로서 정치 제도 및 수뇌부 통치 계급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습니다.

* 다만 이 같은 한계는 시대적인 범주에 기인한 불가피한 사안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또한 통치계급과의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는 것 또한 개신교가 갖고 있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주류 분야로 성장하는 모든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또한 현대의 개신교회들이 이 같은 문제점을 자각하며 자정작용을 통해 비판을 극복하고 발전하려는 모습 또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 종교개혁의 의미

종교개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성서를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자유정신은 보다 객관적인 성서 연구와 성서 언어에 대한 이해의 증가를 가져왔고 성서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계층의 확대를 통해 정신적인 토대와 더불어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직접 접하고 습득할 수 있게 되면서 유럽을 넘어 비기독교 국가에 대한 전도의 방법도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 외적인 의미로는 개신교가 전파되며 동반되었던 청렴도‧보편성‧토론 문화‧사회복지 같은 개념이 함께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직에만 국한된 소명의식을 세속 영역까지 확장시키며 근대사회 발전에 큰 동력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음악, 미술 등 예술전반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과학의 발전에도 기여하여 16~17세기 이후의 모든 영역에 걸쳐 새로운 태동을 이끌어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