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대표 이경섭 목사가 인사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행함이 따르지 않아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자는 율법주의자(legalist)나 알미니안들(arminians)에게서 흔히 발견되고, 후자는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여기선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불신앙이다. 그들은 불신앙을 기독교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 사랑’과 ‘믿음’을 저버리는 것으로 간주한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죄로 심판받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 받아들여서 심판받는다는 말을 들을 때, 일견 ‘괘씸죄 때문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 역사 드라마 같은 데서 독재자나 권세자가 어떤 여성에게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며 ‘내 사랑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이든지 둘 중 택일하라’는 대목이 연상되기도 한다.

과연 사람은 사랑을 이유로 심판을 받는가? 하나님은 누가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를 심판하시는가? 이는 세상 일반의 풍습으로도 성경적으로도 맞지 않다.

사랑을 이유로 누구에게 심판이 가해진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징계는 있을지언정 심판은 없다. 성경에 의하면, 심판은 언제나 ‘율법’의 역할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 18)”는 말씀이 듣는 이에 따라선 ‘사랑을 안 받아들이면 심판을 받는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의는 율법의 완성이신(롬 10:4)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아 그에게서 율법이 성되지 못하니, 그가 율법의 정죄를 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의 변증법적 관계를 제대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 주위에는 별 생각 없이 ‘사랑과 공의(公義)는 하나님의 양대 속성’ 혹은 ‘십자가는 사랑과 공의의 완성’ 운운하는 이들이 있다.

대개 이들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개념에는 “‘사랑 50%, 공의 50%(혹은 사랑 100% 공의 100%), 도합 100%”라는 셈법이 자리하며, 이러한 셈법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야기한다. 대개 신인협력주의는 이런 유치한 셈법에 숨어들어 기생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다. 수학적 표현을 빌리면, ‘사랑 100%’이다. 사랑이 전부이신 하나님에게 있어 공의는 독자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도 공의자체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택자에 대한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다(신 30:6). 공의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그의 거룩한 속성의 발로이며(고전 13:6), 이 모두 사랑에 복속(subjectiveness, 服屬)된다.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의 공의적 행위는 택자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공의의 장벽 때문에 택자에 대한 그의 사랑을 포기하실 수 가 없었기에, 아들을 율법의 수종자로 세우는(아들을 희생시키는) 공의적 행위를 하신 것이다. 택자에 대한 그의 사랑은 말 그대로 죽음같이 강한 것이었다(아 8:6).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신 행위를 그의 공의적 속성에만 맞추는데, 택자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발로였다. 누가 율법적 공의를 이루려고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겠는가? 사랑이라는 대목적(大目的)을 이루려고 아들을 공의의 희생물이 되게 하신 것이다.

◈사랑은 공의의 상대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변증법적(dialectical, 辨證法的) 인식은 믿음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 속성에 대한 치우침 없는 인식이 건전하고 참된 신앙으로 이끈다. 이미 언급했듯 ‘사랑’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속성이고, ‘공의’는 그 사랑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복속적인(subjective, 服屬的)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선 ‘하나님의 은혜’ 외에 ‘인간의 의(義)’가 뒤따라야 한다는 율법주의자, 알미니안(arminian)의 견해가 있다. 그들 주장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 50%, 공의 50%’로 이해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물론 이들이 의식적으로 이런 도식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무의식적 배경에는 그런 인식이 자리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과 공의의 합치’로 규정할 때, ‘하나님 사랑’의 완전함은 탈색되고 율법적 공의가 하나님 개념을 장악하게 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한다(갈 5:9)’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공의의 요구가 사랑, 은혜, 믿음 같은 모든 복된 개념들을 잠식시키고, ‘이신칭의’같은 구원 도리도 발붙일 곳이 없게 한다.

율법 준수에 기반한 영생(永生) 도리를 예수께 물어왔던 부자 관원에게 예수님이 계속 율법적 요구를 주문했듯(눅 18:18-21), 율법적 공의가 죄인에게 요구될 때 죄인의 영혼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black hole)이 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여야 한다는 도식이 성립된다.

이신칭의자자들이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둘 수 있음은 ‘사랑’을 하나님 속성의 전부로, ‘율법적 공의’를 그것의 종속(從屬) 개념으로 본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만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에 대한 장악력을 갖게 되고, ‘이신칭의’ 신앙이 가능해진다.

끝으로, 하나님 사랑에 대해 복속적(subjective, 服屬的) 지위를 가진 율법적 공의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성취를 이룬 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 사랑을 잠식시키는 파괴적 역할을 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세워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 율법적 공의가 미완성인 채로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black hole)이 되어 사랑, 은혜, 믿음 등 모든 것을 다 빨아들여버린다.

이는 마치 성경에 나오는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 음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족하다 아니하는 불(잠 30:15-16)”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적 공의가 완성된 후에는 그것이 더 이상 파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세워주는 역할을 한다. 공의의 완성 전에는 그것이 하나님 사랑을 약화시켰다면, 이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돋보이게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율법적 공의는 하나님 사랑의 결실로 추앙되고, 율법의 수종자 그리스도께도 전적인 신뢰를 바치게 한다.

이렇게 율법의 성취자 그리스도가 높여질 때 영혼 속에 하나님 사랑이 더욱 발분되고, 은혜의 장악력도 도드라진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적 공의가 그것을 이룬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주목하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북돋아 명실공히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