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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27장 9-26절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이 법칙은 ‘비서처럼 하라’라는 책을 쓰신 조관일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법칙입니다.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경험하는 고통의 총량은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겪어야 하는 고통의 양은 결국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해져 있기에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고통은 다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고통의 정량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젊어서 어려움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인생의 후반부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를 만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젊어서 별다른 고생 없이 살아온 사람은 인생의 후반부에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부자들은 인생의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감당해야 하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한 사람이 경험하는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인생은 그 고통을 결국 감당해내야 합니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은 육교를 통해 건너가게 됩니다. 육교로 가면 올라갈 때 힘들지만, 내려갈 때는 힘이 들지 않습니다. 육교가 아닌 지하도를 선택하면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내리막이라 쉽게 갈 수 있지만, 나중에는 오르막이라 힘이 듭니다. 결국 육교로 가든 지하도로 가든 길을 건너는 데 필요한 고통의 총량은 동일합니다.

물론 육교와 지하도를 선택하지 않고 무단 횡단을 감행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무단 횡단을 가감 없이 감행하십니다. 무단 횡단을 하면 별 어려움 없이 길을 건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단 횡단을 하다 교통경찰한테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무단 횡단을 하다 달려오는 차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고를 당하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 이렇게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인생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오르막을 오를 때 너무 좋아하고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갔다 해서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갔으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항해다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배가 항해를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리면 배는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배의 방향을 잡는 것은 바로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에는 해와 달을 보고 방향을 잡기도 했습니다.

배가 바른 방향을 잡아서 항해를 한다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이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만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났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면 어떠한 태도를 보입니까? 풍랑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생각지 못한 풍랑을 만났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랑을 만났을 때, 생각을 좀 달리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났다면,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풍랑 앞에서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다

바울이 타고 가는 배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 광풍으로,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살 소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 신분으로 로마에게 가고 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향해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고 있다면, 풍랑을 안 만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평탄하게 순항하도록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주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생을 항해하는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려는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한다 해서, 꼭 시간상으로 빨리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풍랑을 감당해내야 합니다.

나폴레옹에게 가난은 풍랑이었다

코르시카 귀족이었던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을 귀족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곳 학생들은 가난한 나폴레옹을 조롱하며 놀림거리로 삼았습니다.

참다 못한 나폴레옹은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편지를 썼지만, 아버지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돈은 없지만 너는 반드시 그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의 단호함 앞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 후로 나폴레옹은 5년의 시간을 참고 버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자신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나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간 나폴레옹은 여자와 도박에 빠져 있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홀로 도서관을 지키며 자신과 싸웠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스스로 그리던 미래를 준비하고 자신의 재능을 온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이런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금세 상관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훈련장을 책임지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다른 성과를 올리며 새로운 기회를 얻었고, 권력을 잡을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자 예전에 그를 멸시하고 조롱했던 자들이 모두 몰려와 다시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나폴레옹이 인생의 큰 성공을 맛볼 수 있었던 계기는 그의 불우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가난은 그의 인생에 풍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난 때문에 철없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리는 대신 더 뛰어난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통해 약점을 극복해 끝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가난이라는 풍랑 때문에 자신의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총리가 된 요셉

요셉이 형들의 손에 팔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은 요셉의 인생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풍랑입니다. 이 풍랑으로 인해, 요셉의 인생의 배는 자초하는 것 같았습니다.

요셉은 한 순간에 사랑받는 아들에서 종으로 그 인생이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노예 생활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 인해, 보디발 장군의 가정 총무가 됩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30살의 젊은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30세 젊은이가 애굽이라는 대제국의 총리가 된다는 것이 상상되십니까? 그것도 자국민이 아닌 히브리 민족의 종 출신이요,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갇혔던 죄수가 애굽의 총리가 된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요셉은 17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와 10년간 노예생활을 하고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뭄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가족들뿐 아니라 애굽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은 구원해 냅니다.

요셉의 인생 가운데 형들에게 시기를 받고 애굽으로 팔려가는 풍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30세 나이에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런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려운 우환이 있을 때는 살지만, 생활이 안락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역경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노력하게 하지만, 지나치게 편안한 환경은 의지가 꺾이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안락함과 평안함 누리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찬송가 373장 2절 가사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시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이 곡 작사자는 큰 물결이 일어나는 풍랑으로 인해 힘들고 때로 쉬지 못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풍랑으로 인해 빨리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만날 때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다

어렸을 때 연을 만들어서 날려 본 적이 있습니다. 연을 언제 날려야 높이 날아오릅니까? 바람이 불 때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아무리 연줄을 잡고 힘껏 달려가도 잠시 올라가는가 싶다가 추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날은 연줄을 잡고 달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람을 잘 이용해서 연줄을 잘 조절하기만 하면, 연은 높이 높이 날아갑니다. 연은 바람을 만날 때 더 높이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이, 그리고 가장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새는 ‘알바트로스’입니다. ‘알바트로스’는 ‘바보새’라 불리우는 새입니다. 날개가 너무 크고 움직임이 둔해서, ‘바보새’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폭풍우 치는 날이면 알바트로스는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새로 변합니다. 그 이유는 큰 날개를 펼치고 그 폭풍우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알바트로스가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날 수 있는 새가 될 수 있는 것은 폭풍우 때문입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신 분이 계십니까? 그 풍랑으로 인해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우십니까? 하지만 더 풍랑으로 인해 우리의 목적지로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인생 가운데 풍랑을 만나면,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 가운데 풍랑을 만났다고, 그 풍랑이 모든 사람들을 목적지로 빨리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그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풍랑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한다

첫째, 이들은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습니다.

바울이 탄 배가 만난 ‘유라굴라’라는 광풍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광풍 앞에서, 배에 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광풍이 하루 이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 도 별 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광풍이 얼마나 심했는지, 여러 날이 지나도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어둠만 계속됐다고 말씀합니다. 배에 탄 사람은 아예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이 풍랑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서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4)”.

이런 응답을 받은 바울이 이 광풍 앞에서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풍랑가운데 어떻게 구원하실지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광풍 앞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심한지,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죽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심한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경험을 하였기에,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그 풍랑가운데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풍랑가운데 은혜를 주셨습니다. 믿음을 더 견고케 하셨습니다. 그 풍랑으로 인하여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해 주셨습니다.

풍랑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라비안 교도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도중, 웨슬리가 타고 있는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돛이 산산 조각나고, 배에 물이 들어와 웨슬레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배 한 켠에서 모리비안 교도 25명이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안한 것을 웨슬레는 보았습니다. 평안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라웠고,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아니요 참으로 감사할 일이죠.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인들과 어린애들은 무서울 게 아니겠습니까?”
“천만에요. 비록 아녀자라도 죽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죽으면 천국 가게 될 것인데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웨슬레는 이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풍랑을 맞이하지만, 그 풍랑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만 하고 있는 사람은 그 풍랑 때문에 더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고통 가운데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풍랑 앞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풍랑은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하게 한다

둘째, 이들은 풍랑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깊어질수록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나자 사공들이 어떻게 합니까? 짐을 바다에 풀어버립니다. 풍랑이 점점 더 심해지니까 이제는 배의 기구들을 내버립니다. 나중에는 먹어야 할 밀까지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풍랑이 더 거세어질 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은 다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무엇보다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공들이 자기들만 도망가려고 구명선을 내려놓을 때,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을 설득해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공들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백부장과 군사들은 바울의 말대로 구명선의 줄을 끓어버립니다.

우리는 풍랑이 오기 전까지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옆에 있을 줄 알았던 가족을 잃어버리고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아내가 감상선 수술을 해서, 제가 아내의 빈자리를 메꾼 적이 있습니다.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했습니다. 아내의 빈자리를 지키면서 아내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자리는 당연한 자리가 아니라, 나의 삶에 너무나도 귀한 자리였습니다. 또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고 나서야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앙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풍랑으로 인해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풍랑을 만났을 때 육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함을 깨달아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천국입니다.

1845년 영국의 한 탐험대가 북극해를 건너는 바닷길을 발견하기 위해 대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철저한 훈련으로 준비된 탐험 대원들은 필요한 물품을 배에 가득 싣고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광활한 북극해에 도달했을 때, 대원들은 어이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료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원들이 배의 창고를 확인해 보니 그 안에는 연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의 물건들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1,200여권의 장서와 사기로 된 접시, 크리스탈 컵과 장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은식기 등 온갖 사치품들만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배를 지휘하던 프랭클린이라는 장교가 새 항로를 개척해 다른 나라에 도착하면 사절품으로 사용하려고 가져온 사치품이었습니다.

탐험대원들은 연료가 바닥난 배가 곧 가라앉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썰매를 이용해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교는 썰매 위에 은식기를 하나라도 더 실으려고 몸부림치다, 결국 은식기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영생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육신의 생명은 어떤 귀한 것보다 소중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지만 육신의 생명하고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영생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다 누리고 살았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가장 귀한 것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할지라도 영생을 얻었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천국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풍랑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목적지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맹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일을 줄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며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하는 일마다 틀어지게 한다. 이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인내심을 기르게 하고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잘못을 해야 고칠 수 있으며 마음속에 고민과 걱정이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맹자도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 일을 줄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수고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힘들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더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해 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풍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생을,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