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이 일을 ‘십자가당(十字架黨) 사건’이라고 이름붙이고 상세히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십자가당의 회원은 홍천군 보리울에서 민족교육과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고 있던 한서 남궁억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십자가당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함께 본격적인 독립운동 전개에 목적이 있었다. 이 당은 남궁억의 제자인 유자훈, 김복동, 남궁모 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이들은 집회를 통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으며, 서울의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귀향하면 이들과 함께 농촌운동을 전개했고, 남궁억이 시작한 무궁화운동과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유자훈 목사가 홍천에 부임해 와서 놀란 것은 첩첩산골이라는 선입관이 완전히 틀렸다는 점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글도 많이 깨쳤으며, 민족의식이 충만하여 애국활동이 어느 곳 못지 않게 활발하다는 점이었다.

경찰도 평소 모곡학교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불온한 사상이 떠돈다는 것을 주목해 왔던 터였다. 그 당시 홍천은 가파른 고개를 넘든지 뗏목을 타고 접근해야 했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 산골이 그렇게 지식과 의식이 충만한 사람들로 가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서 남궁억 때문이었다.

남궁억은 모곡학교 학생들에게 ‘뜻’ 이라는 노래를 지어 가르쳤다

“우리는 조선의 아들 딸
몸과 정성을 아끼지 않고
하루 또 하루 배우는 뜻은
조선을 다시 보고 싶어서….”

십자가당의 강령은 이 지상에 함께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첫째,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어떤 인종이라도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다. 차별은 모든 악행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현재의 사회제도에 있어서 계급제도를 철폐하고 평등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누구라도 평등한 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이었고, 넷째는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모두 힘을 합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다고 정했다.

그것은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식민지 백성의 절망을 타개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눈에 거슬렸던 남궁억의 영향력을 말살시키려는 음모가 더해지면서 일본은 사건을 마구 조작했다.

남궁억의 제자로서 모곡학교 교사인 김복동의 일기장을 압수해 검토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십자가당을 빨갱이 단체로 몰아 갔다. 관련자들은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감방 여기저기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문 기술자들은 잠을 재우지 않고 음식도 주지 않았다. 고춧가루 물을 코 속에 붓거나, 각목을 정강이 사이에 끼워 마구 틀어댔다. 고통에 겨워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혓바닥이 나올 지경이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한편 남궁억이 수감되어 있는 사이에 강원도 경찰국에서는 ‘무궁화를 모조리 뽑아 없애라’ 하는 지시를 홍천경찰서에 내렸다.

경찰은 모곡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묘포에서 자라던 무궁화 묘목을 모두 뽑아내도록 명령했다. 학생들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야 이 간나 새끼들아!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해! 몽둥이 맛 좀 볼래?”

도리소 주재소의 순사 정도일이 악을 썼다. 아이들은 마지못해 눈물을 머금은 채 무궁화 묘목을 뽑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남궁억 교장 선생님과 그들 자신의 손으로 심었던 것이었다.

민족의 독립을 꿈꾸며…. 이제 울음이 나고 손이 떨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경찰의 강압과 위협에 저항하지 못한 채 강제노동을 해 나갔다.

여린 손끝이 갈라져 피가 나고 손톱이 다 닳아 나갔다. 그리하여 10만 주 가까이 되는 무궁화가 모두 뽑혀 불태워졌다.

독이 오른 일본 경찰은 보리울뿐만 아니라 홍천 일대의 모든 학교와 마을과 가정집에 심어졌던 무궁화까지 싸그리 뽑아 버렸다. 광분한 그들의 눈에 무궁화는 악의 꽃이었다.

총독부는 그 기회에 ‘무궁화 말살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강원도뿐만 아니라 삼천리 강토에 피어난 모든 무궁화를 보는 족족 뽑아내 불태웠다.

식민지에서는 사람만 고난을 당한 게 아니고 고운 꽃마저도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궁화 묘포에다 일본의 국화인 사쿠라를 심어 두었다.

일본은 아예 모곡학교에 폐교 조치를 내렸다. 모든 교사를 강제 해임하고, 교무실과 교실을 수색한답시고 난리를 쳐서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궁억이 피와 땀으로 이루었던 민족정신의 메카 모곡학교는 텅 비어 폐허로 변해 버렸다.

그러고도 불안했던지 얼마 후 일본은 ‘모곡학교’라는 것을 슬그머니 공립학교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것은 족보를 없애 모곡학교의 흔적마저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1933년 초겨울, 한 달이 넘도록 혹독한 취조를 받은 남궁억과 10여 명의 관련자들은 서울로 송치되어 총독부 검사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았다. 며칠 동안을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남궁억은 검사실로 불려 갔다.

푹신한 안락의자에 푹 기대어 앉은 뚱뚱한 검사는 금테 안경 뒤의 뱀눈 같은 눈으로 남궁억을 노려보며 물었다.

“홍천에 모곡학교를 세운 동기는 무엇인가?”

남궁억은 담담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로 우리 조선민족은 너무나 처참하고 가련하게 살고 있소. 그 원인을 살펴보니, 일반 백성들이 지식을 넓힐 기회가 없어서 무지몽매한 점이었소.

이 사회가 어떻게 되든 그것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다만 그날 그날의 호구 방책만 있으면 만족하는 것처럼 보여 마치 꿈에서 깨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소.

그래서는 앞날의 희망이 없으므로 우선 작은 학교라도 하나 세워 청년과 민중들의 지식을 향상시켜 깨우치려 했던 것이오.”

“그대는 일본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산골에 숨어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주입하여 조선독립을 선동했다는데 어떤가?”

“나는 다만 농민들을 깨우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하려고 했을 뿐이오.”

검사는 씩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대는 학교 조회 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므로 자기는 결코 이 세상에서는 출세하지 않음은 물론,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다곤 하지만 일시적일 뿐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죽어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주입시켰다는데 사실인가?”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 원고 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