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제목: ‘근시안적 안목’이 아니라 ‘원시안적 안목’을 가지라

뮤지컬 천로역정
▲십자가 필그림. ⓒ조이피플 제공
2019년은 3.1 만세운동 100주년

2019년 3월 1일은 3.1 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3.1운동 기념으로 상영된 영화가 <항거-유관순 이야기>다. 저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3.1 만세운동의 기록을 살펴보면, 무려 전 국민의 10분이 1이 참여 했다. 그 중 유관순 열사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3.1 만세 운동을 주동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세 장면이 나온다.

첫째,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둘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라는 민족의 혼이 담긴 노래를 부르면서 작은 감옥을 수용된 여성들이 함께 돈다.

셋째, 유관순 열사의 가족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오빠를 제외한 아버지, 어머니, 유관순이 만세를 부르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 영화에서 식사하기 전 기도하는 장면이 제겐 감동적이었다. 기도하는 장면과 만세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3.1 만세운동은 만세만 부르지 않았다. 만세를 부르기 전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3·1 독립선언서〉 내용 중 첫 번째와 일곱 번째 그리고 ‘공약삼장’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 이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자손 만대에 알려 민족 자존의 올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한다.

일곱 번째, 그래서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니, 남녀노소 구별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할 것이다.

천만년을 이어오는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니,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곧 성공을 이룰 것이다. 오로지 저 앞의 빛을 따라 힘차게 전진할 따름이다.

공약삼장은 아래와 같다.

하나,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정의·인도·생존·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당당하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조선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 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우리나라에게 일제 36년은 쓰라린 아픔이다. 이 아픔은 지금까지도 징용 배상 문제로 일본과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아무튼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 우리나라가 왜 일제에게 36년 침탈을 당했는가? 그것은 당시 지도자들의 안목이 근시안적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동향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 챙겼다.

나아가 하지 않아야 할 당쟁만 일삼았다. 대원군은 자기 업적을 쌓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서 당백전을 발행해서 결국 인플레이션이 발생시켰다.

반면, 민족지도자들이 3.1 만세 운동을 한 것은 근시안적인 안목이 아니라 원시안적인 안목을 가졌기에 가능했다. 3.1만세운동 후 조선이 곧바로 일제로부터 독립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되찾아야 한다는 인식을 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관계, ‘근시안적인 안목’이 아니라 ‘원시안적 안목’으로 하라

사람들은 인맥을 쌓는 방법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당장 이익을 쫓는 근시안적 안목으로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좋은 관계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고 하는 원시안적 안목으로 한다.

사람 관계는 원시안적 안목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을 쫓는 근시안적 안목으로 한다. 소위 발이 넓다는 사람들은 원시안적 안목으로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근시안적이 아니라 원시안적으로 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과 관계는 원시안적 안목으로 해야 한다. ‘바로 앞’이 아니라 ‘저 멀리’ 보고 해야 한다.

당신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과 관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인 사람과 관계를 원시안적 안목을 갖고 해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도 원시안적 안목으로 해야 한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당장 기도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죠지 뮬러는 한 친구가 예수님을 믿는 기도의 응답이 그가 죽은 뒤에 받았다. 기도 응답은 짧고 길고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 응답이 길다. 그들은 응답이 길어도 서두르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25년을 기다렸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본격적으로 사역하기까지 아라비안 광야에서 13년을 보냈다. 저도 하나님 앞에서 인문학 독서를 10년간 했다. 10년이 지나니 교회도 인문학이 중요해져 있었다.

현명한 사람은 원시안적 안목을 갖고 있다

‘현명한 사람’과 ‘현명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졌느냐? ‘원시안적 안목’을 가졌느냐? 다.

믿음의 사람은 원시안적 안목을 갖고 있다. 현명한 사람도 원시안적 안목을 갖고 있다. 우리가 현명한 사람이 되려면 원시안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만난 사람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배우려는 사람이다. 현명한 삶을 사는 사람은 늘 배우고자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데는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린다. 초등학교 입학 후 대학을 졸업하는 데 최소 16년이 걸린다. 그래서 여전히 사회 초년생에 불과하다. 공부는 평생의 할 몫이다.

제게 설교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약 6개월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다. 배우는 것은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평생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짧은 기간에 마스터하고자 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못된다.

현명한 사람은 하나님에 관심을 기울인다

현명한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라는 말이 언급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교회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고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현명하지 않은 사람은 떠도는 말만 듣고 ‘하나님’이라면 무조건 반대한다. ‘교회’라면 갈 곳이 못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나아가 하나님 안에서 구원이 있다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을 모욕하기 바쁘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생물학자인 도킨슨은 “신은 이제 필요 없을 뿐더러 없어져야 할 존재다”라고 했다.

이런 말은 황당한 말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교회에 기능에 대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의 행실만 보고 한 자기 인생을 하나님을 적으로 삼았다.

결국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근신안적이 안목을 가진 사람,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밖에 없다.

현명한 사람은 배우려 한다

성경 잠언은 현명한 사람이 하는 행동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잠 12:15).”

그렇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진리의 말씀이라면 더 관심을 기울인다. 잠언 10장 23절도 이렇게 말씀한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는다.”

현명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을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 교회의 역할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다.

현명한 사람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최대한 배우려 달려든다. 반대로 미련한 사람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배우지 않으려 하지 않으면 결국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될 뿐이다.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잠11:29).”

결국 미련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세상의 종이 된다. 우리는 현명한 자가 되어야 한다. 현명한 자가 되기 위해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20년 트렌드 중 하나가 ‘업글 인간’이다. ‘업글 인간’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와의 경쟁을 꾀한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매일 매일의 성장을 꾀한다.

현명한 신앙생활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다

신앙생활도 현명하게 해야 한다. 현명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 의를 위하여 고난받음이 복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14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다.”

전쟁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 당연하다. 자기 잘못으로 고난 받는 것 받아도 싸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 말은 쉽지만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가 복 있는 자다.

팔복 중 하나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마 5:10)”고 한다. 더 나아가 “고난의 박해를 받는 사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다(마 5:12). 우리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인 선지자들도 박해를 받았다. 그러니 고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럼 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현명하게 하지 못하는가? “복이 있는 자”로 준비 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 처녀 비유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것은 준비가 안 된 것을 뜻한다.

그 처녀들은 기름이 준비 안 되었기에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한다. 다른 처녀들이 나눠줄 리 만무다. 결국 그녀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중에 이 처녀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마 25:11)”라고 했다. 미리 준비하지 못하니 나중에 통곡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철저하게 준비돼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많은 것이 시간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 동화 중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다. 베짱이는 준비하지 않기에 먹을 것조차 없었다. 반면 개미는 준비를 열심히 해 먹을 것이 풍부했다. 자기를 사랑하면 부지런히 준비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게으름만 피운다.

신앙생활에서도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도 사랑한다. 영적인 원리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신 사랑은 당연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니 매사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근시안적인 안목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준비가 되어져 있지 않다. 반면 원시안적 안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니 준비가 철저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니 멀리 보고 인생을 살아간다. 신앙생활도 당장의 떡 고물 한 개가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을 바라보며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한다. 15절 말씀처럼 “항상 준비하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 있으면 오늘도 멋지게 살 수 있다. 오늘 멋지게 준비한 사람은 내일이 기대가 되는 삶을 산다.

오늘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오늘 준비가 철저한 사람은 내일에 원치 않던 일이 일어나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은 지금은 물론 죽음도 준비하며 살아간다.

최근에 암에 걸린 이어령 교수는 그리스도인답게 멋지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그가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주님 앞에서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는 죽음 준비가 끝났다. 사람이 가장 준비하기 힘든 것이 죽음이다. 역시 대가는 죽음도 멋지게 준비를 마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름다운 죽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은 죽음 뒤 그렇게 보고 싶던 주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준비가 완벽하시다

진짜 준비를 철저하게 하시는 분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준비가 완벽하시다. 18절이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죄악 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죽음의 준비가 철저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을 위한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저는 청년 때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신앙이 나약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죽음이 아주 무서웠다. 그래서 죽지 않게 해 달라고 엄청 기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주일 설교를 마친 뒤 누워 있는 상태로 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죽음이 다가올 때 하나님처럼 철저하게 준비 되어 있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은 준비가 완벽하시다.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 면에서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다음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즉 노후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노후 준비를 잘 했는가의 여부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다.

민족지도자 33명은 3.1만세운동을 벌이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했다. 완벽한 준비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수치가 있다. 국민 중 10분의 1이 만세 운동에 동참했다. 그 결과 세계 3.1 만세운동을 통해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천명할 수 있었다.

저는 10년 독서를 통해 노후 준비를 했다. 이 10년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지금부터는 책을 집필하고 강의를 통해 살아가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했다. 이젠 한 가지 준비만 남았다. 건강 준비만 하면 된다. 지금은 100세 시대다. 100세 시대는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도록 준비해야 한다

베드로가 살았던 당시는 이스라엘도 로마 식민지였다. 그때 이들이 할 준비는 딱 하나였다. 깊은 고난의 삶을 어떻게 견디며 살 것인가? 다.

베드로는 당시 성도들에게 두려운 고난을 견디기 위해 한 가지를 준비하라고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그것이 14절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고난을 견디려면 깡다구를 기르는 것이 아니다. 근심과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은혜를 기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위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다른 말로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 받으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이 고난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한다.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이니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언제나 고난 받는 것은 두렵다. 두려운 고난을 극복하는 비결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새기는 것이다. 말씀이 내 안에 성령으로 새겨지면 두려움이 극복된다.

오늘 우리가 가슴에 새길 말씀은 요한복은 14장 27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받을 때 두려움을 물리치려면 거룩한 주님을 모시라고 한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만 거룩한 주님으로 모셔라(15절).”

두려움을 이기려면 거룩한 주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내게 있어야 한다. 결국 두려움 극복은 세상에는 답이 없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는 사람이 가진 것이 있다. 선한 양심이다. 하나님 밖에서 찾는 것은 거짓된 양심이다. 베드로는 16절에 이렇게 말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을 받아도 ‘원시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을지라도 선한 양심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고난을 받으면 밀고가 일상이 된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인다. 그럴지라도 밀고같은 것은 하지 않는 선한 양심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선한 양심을 끝까지 지키려면 ‘근시안적 안목’이 아니라 ‘원시안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럼 왜 ‘근시안적 안목’이 아니라 ‘원시안적 안목’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고난을 통과한 찬가를 하나님과 함께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터키의 서정 시인인 나짐 히크메트가 감옥에서 쓴 시 〈진정한 여행〉의 일부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고,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으며,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난만 통과하면 된다. 그럼 하나님과 함께 찬가를 부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선한 고난을 통과하면,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찬가를 부를 날이 온다. 하나님과 함께 찬가를 부르려면 반드시 원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들도 당장의 눈앞만 본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쫓는다. 하나님과 함께 찬가를 부르지 못하고 가롯 유다처럼 비참함으로 마친다.

제게 설교 글쓰기를 배우러 오는 설교자들이 종종 묻는다.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답한다. ‘적어도 3년은 해야 합니다.’ 그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돌아간다.

많은 설교자들이 근시안적인 눈으로 세상을 살고자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과 함께 찬가를 부르려고 한다. 우리는 원시안적인 눈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 함께 찬가를 부를 수 있다.

원시안적인 안목을 가질 때 하다못해 작은 결과라도 얻는다. 신인 야구선수가 홈런왕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야구에서 타율 3할을 치는 것은 잘 치는 것이다. 4할 타자는 만나보기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홈런을 잘 치는 선수일지라도 2-3경기에 홈런 한 개 겨우 친다.

원시안적 안목을 갖지 못하면 남의 나라에 식민지가 된다. 이스라엘은 당장 이익만 찾아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나님에 의해 바벨론 포로기 70년을 보냈다. 70년 후 예스라서를 보면 에스라가 성경만 읽어줘도 온 민족이 눈물로 통곡했다. 그만큼 감격이 컸다. 이런 감격은 원시안적인 안목을 가질 때 누릴 수 있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는 데 36년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400년이란 암흑기를 주셨다. 즉 400년이 걸린 것이다. 어떤 것이든 짧은 것이 없다. 대부분 다 길다. 그러므로 원시안적 안목을 갖고 살아야 한다.

김경집은 그의 책 《청춘의 고전》에서 학(學)을 이렇게 정의한다. “‘학(學)‘이란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람 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습관이 되도록 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좋은 습관을 한 가지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습관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학(學)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진짜 학(學)을 할 수 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인 간디는 비폭력 운동을 오랫동안 벌였다. 그 운동이 효과를 드러낼 때까지 했다. 오랫동안 했기에 비폭력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다.

간디가 강조한 것이 있다. “절대로 불의를 불의로 갚아서는 안 된다.”

그러자 간디를 따르는 무리들이 몽둥이로 때리면 맞았고, 모욕을 주면 정중하게 엎드려 받았다. 간디는 말한다. 영국이 폭력을 휘두르면 내게 축복이 내린 것이라 했다.

간디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내게 축복을 내린 셈이다. 그들 스스로 정의를 알린 셈이니까”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벌인 비폭력 운동의 결과로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해방 운동이 현실이 되었다.

헨리 포드는 오랫동안 사업을 했다. 하지만 남과 다르게 사업을 했다. 헨리 포드가 1908년, 헨리 포드가 ‘T형’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면서 내세운 광고 문구가 있다.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포드는 생산비를 아끼기 위해 한 푼이라도 임금을 꺾으려 하던 시대에, 되레 일당을 올렸다. 일당 2.34달러에서 5달러로 두 배 이상 올렸다. 근무 시간도 하루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였다. 더 나아가 ‘T형’ 자동차 가격을 1912년 600달러에서 1916년 360달러, 1925년 250달러로 내렸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 없다. 현대 자동차가 외형만 바꾸고 매년 값을 올리는 것에 비하면 충격적이다. 임금을 올리니, 노동자들이 몇 달 봉급을 모아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다르게 사니, 남다른 사업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미국에 ‘T형’ 자동차가 미국 전역 그리고 전 세계에 굴러다니게 했다. 포드는 이런 사업을 오랫동안 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고난, 반드시 끝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면 고난이 짧지 않고 아주 길다. 고난이 길면 고난 받는 것, 오랫동안 견뎌야 한다. 우리는 긴 고난을 당할 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고난이 아무리 길어도 끝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것도 끝이 있다. 끝이 없이 살고자 했던 진시황도 불로초를 먹었지만 끝을 보고 말았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도 그의 나라가 영원할 줄 알았지만 결국 끝을 보았다. 제국을 이룬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 왕도 끝을 보았다.

그러므로 고난의 깊이가 깊어도, 하나님의 선한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고난은 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 “역경은 누구나 극복할 수 있다.”

역경은 끝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한다(13절).

‘교각살우(矯角殺牛)’를 버려라

고난이 깊을수록 ‘근시안적 안목’이 아니라 ‘원시안적 안목’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르친 삶을 살게 된다.

‘교각살우(矯角殺牛)’란 사자성어가 있다. ‘소의 뿔 모양을 바로 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이다. 즉 작은 흠이나 결점을 고치려다가 오히려 일을 망치고 그르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과 같다.

근시안적 안목은 하나님을 뜻을 헤친다. 하지만 원시안적 안목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원시안적 안목으로 살려면 나를 하나님 안에서 녹여야 한다.

초콜릿은 사람의 입안으로 들어갈 때 녹여서 맛을 낸다. 원래 초콜릿은 딱딱하다. 초콜릿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녹기 시작한다. 녹으면서 그 맛을 낸다. 결국 녹아짐으로 맛을 낸다.

신앙생활은 내가 어떤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녹아져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을 위한 선한 양심으로 살 수 있다.

고난을 받으려면 이기심이 녹아져야 한다. 불순종이 녹아져야 한다. 교만함이 녹아져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녹아지는 순간 하나님의 맛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선한 양심으로 살려면 성령 안에서 내가 녹아져야 한다.

우리는 ‘근시안적 안목’이 아니라 ‘원시안적 안목’으로 신앙생활 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 함께 찬가를 부를 수 있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