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대표 이경섭 목사가 인사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한 죄인에게는 시대를 불문하고 그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말세(末世)이다.

예측불가한 죽음과 그에 따르는 사후(死後) 심판, 불시에 닥칠 인류의 종말 심판이 그가 사는 현세(現世)를 말세로 만든다. 이렇게 말세를 사는 인간을 종말론적인 존재라고 한다.

‘말세에 구원을 받으라(행 2:19-21, 벧전 1:5)’는 말씀에서도 보듯, ‘구원’이라는 말엔 ‘종말성’이 담지 돼 있다. ‘예측불가’하고 ‘불가항력적’인 종말적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이다.

인생사에서 종말론적 사건을 꼽으라면, 당연히 ‘인간의 죽음’과 인류의 종말인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죽음은 그것의 ‘예측불가’와 사후의 심판에 대한 ‘불가항력’의 속성을 지닌 종말론적 사건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조나단 에드워즈가 ‘오랏줄을 목에 맨 사형수’에 비유한 ‘죄인의 운명’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인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을 의미했다.

인류의 종말 역시 ‘예측불가적(마 24:36)’이고 ‘불가항력적’으로, 덫처럼 불시에 임한다(눅 21:34).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살전 5:1-3)”.

성경이 구원을 말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사후’과 ‘인류 종말’심판에서의 구원이다. 인간의 간여가 불가한 ‘급박하고 불가항력적’인 심판에서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이는 그의 영원한 사랑에 기반 한다(엡 1:3-7). 그리고 구원으로 말미암는 ‘하나님 사랑’의 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 앞에서 담대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함이라(요일 4:16-17)”.

그리고 죄인의 종말론적 실존은 복음전도의 양상을 결정짓게 한다. 어떤 영국의 목사님이 똑같은 장소에서 수 십 년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오늘 밤에 죽으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전도했다고 한다.

일견, 시대착오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전도 방식으로 보일지 모르나, 깊은 신학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예측불가하고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심판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 실존을 직시한 데서 나온 종말론적인 방식이다.

이렇게 종말론 의식으로 충만한 전도자는 피전도자들의 ‘나중에 믿겠다’는 핑계에 설득당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즉각적인 결신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믿음, 무능한 인간을 위한 구원 방식

심판의 종말론적 속성은 인간이 그것을 거부할 수도, 유예시킬 수도 없는 ‘예측불가성’과 ‘불가항력성’을 담지한다. 구원은 바로 이런 종말론적 심판에서의 건짐이다. 그리고 이 심판에서의 건짐이 ‘믿음’이다.

이 방식은 자기 구원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구원 방도이다. 만일 ‘믿음’이 아닌 인간의 간여가 가능한 구원 방식이라면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에서의 구원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설사 종말 심판의 급박성이 유예돼 뭔가를 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시간을 부여한다 해도, 전적으로 무능한 죄인이 자기 구원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종말을 100년 유예시켜 준다 해도 그 100년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중풍병자가 38년 동안 지척에 있는 치유의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것과 유사하다(요 5:2-7).

그가 50년을 그 자리에 더 있었다 해도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은 0프로이다. 예수님이 와서 그를 구원해주지 않았다면 그에겐 영원히 구원의 길이 없었다.

전적 무능한 인간은 그의 전 생애를 투자해도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종말론적 죄인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께 의존될 뿐이다. 죄인은 오직 그리스도가 완성한 ‘구원의 의’를 믿음으로 전가 받을 뿐이다.

하나님이 말세의 구원 경륜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행 2:17-21)”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단지 재림을 목전에 둔 말세지말(末世之末)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비상적(非常的) 구원 경륜이 아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종말론적인 운명에 처한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 방도이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도록 한’ 이 구원 경륜은 ‘죄인이 얼마나 급박하고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으며,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믿음, 종말론적인 구원 방식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종말의 시작임을 알린다(마 3:2). 이는 그리스도가 구속을 성취하므로 종말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종말’이라는 End는 ‘끝’이라는 뜻과 함께 ‘일의 완수’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운명을 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것은 ‘구속의 완성’을 선언한 것인 동시에, ‘종말’을 선언하신 것이기도 하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그가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이제 더 이상 역사(歷史) 존속의 의미가 없는, 말 그대로 ‘역사의 종말’이 도래했다는 뜻이다.

실제 인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완성’을 정점으로 설계됐으며, 그것의 완성으로 사실상 역사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둘째로 그리스도의 구속 완성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도모하려는 모든 노력에 종말을 고하게 했다는 뜻이다.

죄인이 자기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은 ‘인간의 전적 무능’의 이유 외에, 그리스도가 구속을 완성하시므로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 구속을 보면서도, 자기 구원에 뭔가를 기여하려고 하는 사람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그의 선언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켜 구원 얻으려고 하는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한 말씀을 연상시킨다.

사도 ‘누가’가 ‘종말(end)’을 말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그리스도가 구속을 성취하시므로(End, 요 19:30)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게 됐다(행 2:11)’는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어주시므로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했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할렐루야! 우리의 의가 되신 그리스도께 영광!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