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7-10절)”.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교회 안에서 설교하는 교역자들이나 지도자들, 그리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실천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분명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그 분의 성품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실천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요, 그리스도는 사랑의 계시이며, 형제사랑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4장 20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 거짓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연약해짐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의 것을 나누어주어야 할 때 너무도 쉽게 외면하면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음을 부정하기 쉽지 않았던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 대문간에 앉아 매일 구걸하던 나사로를 외면한 부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랑하라는 당부를 시시각각으로 하셨는데도,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실천력이 부족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파악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속죄제물로 보내주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가 없으면 사랑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가르치는 바는 분명합니다. 가난한 나사로를 외면한 부자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는 큰 기적을 바랄 것이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확실하고 훌륭한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그 분의 구원을 전하는 성경 말씀이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도 있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생명을 살리고 소망을 주는 거룩한 성소로서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우리에 대한 예수님 사랑의 구체적 체험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성경의 가르침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친교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사랑을 찾고 배우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나 교회 안에서 생활할 때도 너무나 마음 아픈 일들이 많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방의 오해로 인한 증오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자칫 주님의 사랑을 변질되게 하는 경우를 종종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장 24절)”.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시고 당부하신 말씀을 그저 듣는 것으로 머물러 있는 신앙인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닌, 듣고 실천하며 행하는 믿음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리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에게 시기와 모함, 그리고 권모술수를 다 써가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을 목격하노라면, 울화가 치밀어올 때, 그 순간을 참아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벌통과도 같은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벌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여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함으로 벌통을 덮으며 벌들을 지켜내고 있는 것처럼 사랑은 모든 것들을 덮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벌통의 주인은 많은 꿀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합니다. 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은 애를 겪으며 수고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끝에는 복음의 달콤한 꿀을 생산하여 세상을 향한 나눔의 기쁨이 충만한 따뜻한 가슴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의 체험이 크면 클수록, 사랑의 능력은 자라고 또 자라날 것임을 깨달아, 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되어, 세상을 향한 사랑의 빛과 물결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