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다큐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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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부부가 되면, 두 사람은 동등한 존재가 된다. 문화적으로나 제도적으로도 그렇고, 하나님의 섭리로도 그렇다.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높고 낮음이 없다. 한쪽이 대통령이든 여왕이든 상관이 없고, 둘의 신분이나 자격은 궁극적으로 같아진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해도 분명 서로 다른 조건 아래에 있고, 누군가는 저자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누구나 끼리끼리 만나는 게 편하고, 같은 문화와 같은 환경,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좋은 법이다. 너무 차이가 나면 위화감이 생기고 이질감이 느껴져 관계에 골이 생기기 쉽다.

인생에는 늘 예외가 있어서 차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적지 않고, 아무리 비슷해도 부분적으로 조금이라도 차이는 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방에 대해 열등감을 느낄 수 있고 초라해질 수 있다.

외모에서 차이가 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다를 수 있다. 나이 차이, 학력 차이, 사회적 성취도의 차이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비굴해선 안 된다. 비굴한 순간 사랑은 싸구려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굴함이란, 상대방에게 끈질기게 사랑을 구하거나 헤어질 위기에 어떻게든 잡아보려는 따위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이, 사랑했던 사이라면 사랑을 구하는 일이나 멀어지는 사람을 잡는 행위는 비굴함이나 구차함이 아니다.

비굴함이란 내가 좀 ‘꿀릴 때’ 위축되는 것을 말한다. 시댁이나 처가가 우리 집과 너무 차이가 나서 자존심이 상하는데도 참으면서 굽히고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맞춰주는 따위의 일이다.

상대방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내 조건이 처진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데…. 솔직히 나한테는 과분한 사람인데 떠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등등.

사실 이런 감정은 늘 여자보다 나아야 한다는 태생적 강박을 지닌 남자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하지만 비굴한 모습은 상대방에게 점수를 따기는커녕, 짜증만 유발한다. 그것은 배려나 착함, 너그러움, 예의 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왕은 자신에게 한없는 저자세로 손바닥을 비비는 신하보다, 목숨을 내놓고 당당하게 진언하는 신하를 아낀다.

비굴함은 아첨이며 그 자체로 가증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위아래가 없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인데, 조금 모자란다 해서 저자세로 나가면 진짜 꼴보기 싫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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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한쪽이 처지는 관계는 분명히 있다. 한동안 상대방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때도 비굴하면 안 된다.

예전에는, 가난한데 공부는 잘하는 애인을 어렵게 뒷바라지했더니 대기업에 입사해 승승장구하다가 연인을 버리고 회장 사위 겸 후계자가 되는 멜로드라마가 흔했다.

그런 남자가 진짜 있다면 여자의 고마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고생하던 시절 자신도 모르게 들었던 비참함과 열등감에 괴물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구질구질한 상황을 탈피하면서, 그간 느꼈던 알 수 없는 자격지심을 배신의 핑계로 삼았을 수도 있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타고난 못난 마음이 사랑하는 이에게 느낀 비굴함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부귀영화의 길을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이 느끼는 비참한 심경을 일거에 없애줄 방법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이 드는 사랑 앞에서의 비굴함과 비참함을 어떻게 극복할까….

무조건 센 척을 할 수도 없고, 무작정 참을 수만도 없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자니 티가 나고 더 어색하다.

그런 눈치를 채고 상대방이 더 잘해주는 것도 싫다. 본인 스스로에게도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고심이 깊어지고 관계를 견디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사실 이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헤어지는 연인들이 적지 않다. 둘 다 형편이 어려웠는데 한쪽이 먼저 직장생활을 하게 된 커플이나, 남자가 군 복무로 사회 진출이 늦어졌는데 여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립하면 남자가 스스로를 무능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본능상 남자는 여자를 책임지고 필요를 채워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비굴한 캐릭터로 사울 왕 같은 사람이 나온다. 비유 속 인물이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도 비굴한 자다. 이들의 공통점은 열등감이며 대인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려도, 아무리 상대가 하나님의 천사라도, 내가 좀 다치더라도 한판 붙어 맞짱 뜬(?) 야곱과 같은 용기와 당당함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기록한다(호 12:3-4). 그런 끈질김에 장인 라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내 라헬을 얻었다.

연애는 다큐다 89
▲<시작은 키스>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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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키스>(2011)라는 프랑스 영화는 <아멜리에>(2001)로 유명한 배우 오드리 토투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3년 전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한 나탈리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간부다. 하루는 스웨덴 출신의 어눌하고 못생긴 부하직원 마르퀴스가 업무 보고차 방으로 들어왔는데,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깊이 빠져 있던 나탈리는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 남자에게 키스를 하고는 그 사실조차 잊고 만다.

실수로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조금씩 알아갈수록 남자는 의외의 매력을 지닌, 우리 식으로 ‘진국’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막상 남자는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자기 앞에 펼쳐지는 잘나가는 미모의 직장상사와 펼쳐지는 ‘썸’이 믿기지가 않았다.

​하루는 산책 중에 남자가 속내를 꺼낸다. 다 좋은데, 우리 사이가 너무 차이가 나서 자신이 없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둘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한다.

“그게 마치... 미국 옆에 캄보디아가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와 닿는 비유라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빵 터진 장면이었다. 아마 그 남자가 그 어마어마한 차이를 아무 문제 아닌 것처럼 무시했거나, 동등하게 대하기 위해 호기를 부렸다면 꼴불견이었을 것이다.

마르퀴스의 진솔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도저히 이 관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잘못 되면 나중에 자기가 받을 상처를 감당할 수 없다면서 그녀로부터 도망친다. 그러자 나탈리가 오히려 그의 진심을 알아보고 마음을 열게 된다.

가끔 보면, 누가 봐도 처지는데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센 척하는 사람도 있고, 상대방의 훨씬 나은 점을 애써 폄하하는 사람도 있는데, 다 보기 좋지는 않은 것 같다.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오버하는 모습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그건 비굴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당당하지 못한 것이다.

상대와 차이가 많이 날 땐 그냥 그 자체로 인정하고, 솔직히 그런 차이로 힘든 부분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좋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물고 물리는 관계인데, 연인이나 배우자 앞에서까지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하겠는가.

솔직함은 비굴함과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 상처가 되는 관계가 되지 않도록 미리 깨우는 알람 같은 것이다.

뭔가 초라한 기분, 그대 앞에만 서면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징조다. 어떻게든 그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포커 페이스에 거짓말을 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에게 없는 것까지 동원해 허세를 부리려 할수록, 더욱 자괴감만 들 것이다. 비굴하지 않기 위해 더 비굴해지는 아이러니다.

사랑 앞에 비굴하지 말라. 열등감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얻은 사람은 삐뚤어진 마음 안에서 애증의 대상으로 자라날 수 있다.

모자란 것이 있다면, 부족함을 채우는 노력도 필요하다. 부족해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며, 솔직하고 또 당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고 자꾸만 비굴 모드가 된다면, 십중팔구 그 사람은 당신의 짝이 아닐 것이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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