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 연애는 다큐다 사랑 아이 따뜻 인형 온기 은혜
본문: 베드로전서 3장 8-12절


세상은 ‘도무지’ 답이 없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그의 책 《위대한 설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이 주장은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책의 출판 다음 해인 2011년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과 가진 인터뷰에서 죽음, 인간의 목적, M 이론 등에 관해 이야기 하며 이런 말을 했다.

“천국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다.”

그는 사후 세계의 존재를 부인했다. 결국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부인을 못 박았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던 그는 2018년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영적으로 ‘도무지’ 답이 없는 사람이다.

이스라엘도 도무지 답이 없는 민족이었다. 출애굽 때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일상이었다. 사사기 때는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이 습관적이었다. 바벨론 포로 전에는 우상 섬기는 것이 삶의 일부였다. 이스라엘은 ‘도무지’답이 없는 민족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도무지’ 답이 없는 삶을 살면 안 된다. 답이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 답을 주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희망을 주려면 ‘도무지’ 답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도리어’ 답을 주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였던 이재철 목사는 세상에 희망을 주었다. 그는 퇴임하면서 “거침없이 나를 버려달라”고 했다. 이런 인생이 ‘도무지’ 답이 없는 세상에 ‘도리어’답을 주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한다.

북한은 ‘도무지’ 답이 없는 나라다.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몇 안 되는 나라중 한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세상에서 폐기처분 직전이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삶은 피폐함이 극에 달한다.

중국과 베트남도 체제만 유지하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택한다. 공산주의가 ‘도무지’ 답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은 여전히 답이 없는 나라다.

감난도는 그의 책 《트렌드코리아 2020》에서 두 번째 트렌드로 고객의 마지막 순간의 만족을 최적화하려는 근거리 경제를 ‘라스트핏 이코노미’를 이야기한다. 그 중 첫 번째인 고객의 마지막 접점까지 편리한 배송으로 쇼핑의 번거로움을 해소해주는 ‘배송의 라스트핏’을 이야기한다.

배송은 주로 오전이나 오후에 했다. 그러나 현재 국내 배송 업계의 화두는 ‘새벽’이다. ‘누가 가장 빨리 소비자의 문 앞에 당도하는가’라는 과제다. 이제 새벽 배송도 모자라, 그보다 더 빠른 ‘야간 배송’에 뛰어든 유통업체들도 증가하고 있다. 답이 없자 답이 있는 회사를 만들기 의한 일환이다.

‘도무지’ 답이 없는 인생이나 나라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이는 자기고집 때문이다. 자기 생각의 고집, 자기들이 만든 체제에 대한 고집 등이다. 저도 한 고집하는데 고집은 대부분 아픔으로 이어진다. 결국 버릴 것은 ‘도무지’ 답이 없는 고집이다.

‘도리어’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전에 아래와 같은 말을 한 것을 들은 적 있다. “하나님도 고집이 세시다. 쇠심줄보다 더 세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뜻을 굳게 세우셨을 뿐이다. 십자가를 봐라. 십자가가 고집의 산물인가?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고집은 주위를 힘들게 한다. 뜻은 주위를 훈훈하게 한다. 십자가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었다. 죄인들에게 마지막 붙들 희망이 되어주었다.

하나님은 뜻을 세워서 일하신다. 그 뜻은 인생들에게 희망이 된다. 이는 선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된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 뜻을 세우기 원하신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9절).”

악이나 욕이 아니라,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신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도무지’ 답이 없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인은 ‘도리어’ 답이 있는 복을 비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리어’의 삶은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마음일 때 가능해진다. 육적이지 않고 영적일 때 가능하다. 그럴 때 ‘도리어’ 복을 빌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죽이는 고집과 살리는 고집

세상은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도무지’의 삶과 ‘도리어’의 삶이다. 마태복음 7장에 빌라도는 ‘도무지’의 삶이다. 예수님은 ‘도리어’의 삶이다. 빌라도에게서는 오직 어떻게 하면 자기만 살 것인가에 몰두한다. 그것이 마태복음 27장 23-26절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 27:23-26)”.

자기만 살기 위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었다. 자기는 무죄하다고 주장한다. 피를 백성들에게 돌린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히 다르시다.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신다. 그것이 마태복음 20장 28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은 죽고 죄인들 대속물로 주시려 하신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빌라도,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예수님, 빌라도는 버려야 고집을 피우고 있다. 예수님은 살리고자 하는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에수님의 고집은 선한 고집이다. 생명이 담긴 고집이다.

똥고집과 거룩한 고집

빌라도의 고집은 ‘똥고집’이다. 예수님의 고집은 ‘거룩한 고집’이다. 똥고집은 ‘도무지’로 결말이 난다. 거룩한 고집은 ‘도무지’를 ‘도리어’로 바꾸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도무지’를 ‘도리어’로 바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원하는 삶은 이익 취득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가치 추구다. 인간이 물질적인 가치추구라면 하나님은 영적인 가치 추구다.

세상에도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의인’, ‘열사’, ‘의사’라고 명명하는 사람들이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가치를 추구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가치를 추구하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간다. 빌라도는 자기를 위해 살아갔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갔다.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인간에게 없던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졌다.

의인 중 한 명이 이수현 씨다. 그는 2001년 일본에서 열차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자기 목숨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는 일본인을 위해 바쳤다.

요나는 자기들을 핍박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지 않겠다고 다시스로 도망갔다. 이것이 사람들의 삶이다. 의인은 반대다. 세월호 때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제자들 먼저 대피시키고 배에 걷혀 숨진 안산 단원고 고창석 선생님이다.

일제 때는 아주 많았다. 그 중 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다.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서는 이한열 열사가 있다.

이들은 빌라도가 아니었다.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는 죽더라도, 다른 사람을 살리려 했다. 그 이유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희망을 선물로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려면 우리 힘으로 안 된다. 오직 예수님의 힘으로만 된다. 그것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기 때문이다(롬 8:26).

예수님의 힘으로만 되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그것은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의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만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멀리 하시기 때문이다(12절).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의인, 의사, 열사로 사는 것은 추천할 만하다. 그리스도인이 진짜 살아야 할 삶은 하나님나라의 의인이다.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박국 2장 4절 말씀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즉 믿음이 의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야고보 기자도 의인이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드릴 때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렸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셨다(약 2:21).”

기생 라합도 믿음으로 행했기에 의롭다 함을 인정받았다(약 2:25).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갈 2:16)”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 기생 라합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다.

의인의 삶은 답이 있는 삶이다. 의인은 ‘도무지’ 답이 없는 삶도 ‘도리어’답이 있는 삶을 만든다. 그것은 의인의 삶은 세상 사람과 사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악인은 그 반대다. ‘도무지’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 이유는 인간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악을 행하는 삶을 산다. 결국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도무지’의 답이 나오는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달라도 확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도무지’의 삶이 아니라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9절 말씀처럼 “축복받는 인생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반전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오늘 설교 본문은 베드로가 당시 그리스도인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다. 베드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을 한다.

당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이 일상이었다. 의인의 삶도 고난의 삶이 일상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이 아브라함, 다윗, 모세, 야곱, 욥, 바울의 삶은 고난의 삶이 일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는 고난의 삶이 일상이다.

고난의 삶이 일상인 것은 고난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을 때에도 반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10절과 11절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베드로는 악을 쫓아할 상황에 악 대신 선을 쫓으라고 한다. 불화가 극심할 때도 화평을 쫓으라고 한다. ‘도무지’ 할 수 없을지라도 ‘도리어’ 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반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반전의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때 유대인과 로마인들을 불로 멸망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로마와 싸워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패배를 선택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상과 역주행해야 한다

반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반전 있는 삶은 세상과 ‘역주행’하는 삶이다. ‘역주행’이란 말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있다.

먼저, 나쁜 의미의 역주행이다. 바로 자동차와 같은 역주행이다. 자동차는 역주행하면 안 된다. 그럼 자신과 남에게도 불행만 안겨준다. 결국은 비참함이다.

다음으로 좋은 뜻의 역주행이다. 보통 가수들의 노래나 책에 사용된다. 처음에는 관심 밖이었다가 어떤 계기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 것과 같은 의미다. 노래로는 윤종신의 ‘좋니’와 이애란의 ‘백세인생’이 역주행의 대포적인 노래다.

세상은 하지 않을 자동차와 같인 나쁜 의미의 역주행이 많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좋은 의미의 역주행이어야 한다. 그 역주행은 ‘도무지’를 ‘도리어’로 바꾸는 것이다.

인도의 선다 싱(Sundar Singh)은 신앙의 역주행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바울은 신앙의 약주행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삭도 반전의 삶을 살았다. 이삭은 한 동네로 이사를 갈 때마다 우물을 팠다.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삭이 우물을 파고나면 토박이들이 자기들 우물이라고 우기고 빼앗았다. 그럼 싸워서 우물을 도로 찾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또 다시 우물을 팠다.

이삭은 좋은 의미의 역주행을 한 것이다. 즉 ‘도무지’를 ‘도리어’로 바꾸는 삶을 살았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거부로 만들어주셨다. 신앙의 거부, 믿음의 거부, 삶의 거부로 만들어주신 것이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도무지’를 ‘도리어’로 바꾼 믿음의 사람이다.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러자 자녀를 낳은 브닌나에게 한나에게 갑질을 했다. 이런 경우 한나가 브닌나를 내쫓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한나는 내쫓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모욕이 계속되자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 기도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라엘의 최고의 선지자 사무엘이다. 한나는 신앙이 세상과 역주행 하는 것이 뭔지를 보여주었다.

성경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마 5:41)”고 하신다. 이는 세상과 억주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역주행하는 사람들이다. ‘도무지’의 환경을 ‘도리어’의 환경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도무지’의 삶이 아니라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이 욕망을 추구할수록 교회는 더욱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다. 연세대를 설립한 미국의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언하시기에 ‘도무지’의 환경에서 ‘도리어’의 삶을 살았다.

뉴욕에 있는 형이 운영하는 잉크와 타자기 회사가 세계 제일의 회사로 발돋움할 때였다. 그러자 형이 미국으로 와서 사업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언더우드는 새로 내한한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 의사 등을 데리고 함경도 탐사 여행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 시골 들판에서 그 편지를 그리어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어슨 의사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리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이 아닌가!”

우리는 편안한 삶을 쫓는다. 언어우드 선교사는 달랐다. 편안함 대신 불편함을 쫓았다. ‘도리어’의 삶을 선택했다. 곧 세상과 역주행하는 삶을 선택했다.

최근 화제가 된 기사가 있었다. 임희정 전 아나운서 가족 이야기다. 그녀의 환경이 ‘도무지’의 아나운서가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을 소중하게 여겨 ‘도리어’의 삶으로 바꿔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가정사를 공개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나왔다. 아나운서까지 된 딸이 부모를 자랑스러워하기 쉽지 않다. 누군가 그런 사실을 알까봐 감추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그녀는 막노동 하는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엄마도 자랑스러워했다. 임희정 아나운서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있다.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모두의 부모가 존중받길 바란다.”

그녀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말을 함으로 살아온 삶을 ‘도리어’로 바꿨다.

‘딜레마’ 신앙을 ‘디딤돌’ 신앙으로 바꿔라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도무지’의 신앙을 ‘도리어’의 신앙으로 바꿔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도무지’의 신앙을 ‘도리어’의 신앙으로 바꿀 수 있는가? ‘딜레마’ 신앙을 ‘디딤돌’ 신앙으로 바꾸면 된다.

‘중간소득 함정’이란 말이 있다. 한 국가의 경제가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 성공적으로 경제 개발을 시작하더라도 ‘중간 소득’수준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성장이 서서히 멈추는 현상을 말한다.

경제가 딜레마에 빠진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도 2만 불에서 3만 불로 넘어가는 데 12년이 걸렸다. 3만 달러를 못 넘을 것 같기도 했다. 소득 성장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면 디딤돌을 마련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집안에 폐족(廢族)이 되었을 때, 그 폐족 집안을 딜레마가 아니라 디딤돌로 삼기 위해 아들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다음과 같다.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구실을 하겠느냐.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되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폐족으로 남지 않으려면, 독서를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다산이 독서를 통해 500권이 넘는 책을 씀으로써, 지금 사람들에게는 가장 존중받는 사람이 되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디딤돌이 되려면 신앙생활이 근심 보따리가 아니라 웃음보따리로 장착된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을 할 때는 두 개의 보따리를 갖고 한다. 하나는 근심 보따리다. 또 다른 하나는 웃음 보따리다. 근심 보따리로는 ‘도무지’로 그치는 신앙생활이다. 웃음 보따리가 ‘도리어’의 삶으로 바뀐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은 내 힘으로 신앙생활하면 근심 보따리를 지고 신앙생활하게 된다. 하나님의 힘으로 신앙생활하면 웃음보따리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신앙생활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요나가 상황을 바꾸었다고 달라진 게 없다. 도리어 추락했다. 이삭은 상황을 바꾸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니,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팔 수 있었다. 11절의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는 것은 나를 바꿀 때 가능하다.

‘도무지’의 상태를 ‘도리어’의 상태로 바꾸는 것은 상황을 바꾼다고 되지 않는다. 나를 바꿀 때 된다. 근심 보따리를 지고 하는 신앙생활도 나를 바꿀 때 웃음 보따리를 지고 할 수 있다.

나를 바꾸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된다. 선한 노력으로 안 된다. 강한 신념으로 안 된다.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전심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과 같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와 같이 기도해야 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