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교회 언덕 해 빛 햇살 구름 하늘 소금
▲ⓒ픽사베이
1. 오늘 아침은 어떠셨나요. 어제와 조금 다르던가요. 아침이 되어 주어진 햇살에 마음이 두근거리시나요.

거울을 보면서, 어제 못 보던 희미한 주름살이 보여 행복해지시던가요. 아니면 햇살 눈부셔, 어둠으로 숨게 만들고 있나요.

2. 안타깝게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삽니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 습관은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무리’를 짓거나, ‘숨어버림’입니다.

자기 자신의 달라지지 않는 모습을 감추거나,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받고자 합니다.

3. 수없이 많은 결단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후회한 어제를 오늘도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반복은 다시 행동을 강화시켜서, 행동하는 대로 혹은 행동하고 싶은대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동시에 그러면서도 내일이 불안함을 느끼고는, 내일 불안한 이유를 돌아보기보다 오늘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시 편안한 사람을 만납니다.

편안한 사람을 통해 행복이라 착각하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내일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내일이 온다 한들, 달라질 리가 없습니다.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으니, 인생이 마치 쳇바퀴 돌듯 돌아가며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4. 어제와 내일은 양 극단의 단어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협의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와 내일은 바로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융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속에 보다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창조 공학’에는 이같은 사실이 분명히 서술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5절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

원문 그대로를 살려 보다 정확히 전달하면, ‘거기에 밤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아침이 있었다. 그것이 첫째날이다’ 입니다. 그러니까 하루는 밤에서부터 시작되어, 아침까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5. 나아가 이 말씀 속에는, 어둠과 빛이라는 또 다른 단어의 충돌이 있습니다. 어둠과 빛은 양 극단의 단어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한쪽으로 가기 위해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다른쪽 극단의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과 빛이라는 구조적 단어를 우리는 다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욕망과 거룩입니다. 죽음과 생명입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생명을 추구할 리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모르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6. 하나님은 낮을 빛이라, 밤을 어둠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내 어둠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자기 내면 속 어둠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이 빛된 삶을 추구하기는 힘듭니다. 백날 빛된 삶을 결단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자기 어둠과 아픔을 직시하는 사람만, 반드시 빛된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6. 지금도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새벽을 깨웁니다. 그러나 그 새벽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발생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처럼 새벽기도에 열심힌 민족이 없습니다. 2천년 전 열두 제자가 역사를 새롭게 했다면, 한국 사회 역시 바뀌고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근원적 문제는 모든 일과를 마치고 가는 집안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가장 문제되는 시간은 어둔 밤 홀로 있는 때, 꿈틀대는 욕망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늘 조심하지만, 그 눈들이 사라지면 마음껏 동생 아벨을 끌고가 들판에서 살육을 했던 현장, 죄를 지어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수풀 안에 숨어 아담은 여자를, 여자는 아담에 넋이 나가 살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 착각했던 욕망의 현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7.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새벽을 깨워 유명해지고 대형화된 교회가 있습니다. 한때 성경공부로 유명했던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교회로 인해 세상은 등을 돌리고, 거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 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그들은 이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한들, 새벽을 깨우고 시작해도 하루는 이미 시작부터 망친 채 절반이 지난 것입니다.

8. 따라서 하나님께서 애초에 두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던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관계가 형성되면서부터, 그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내 소유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멀리합니다. 모든 것이 결국 욕심의 문제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신앙 생활이 흔들림이 올 때는 관계가 헝클어지기 마련인데, 관계 속의 문제는 대부분 욕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9. 박지범 목사님께서 지난 주간 너무나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문제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에리히 프롬도 ‘소유냐 존재냐’는 명제를 통해, 존재의 귀함을 누누이 말했습니다. 왜 우리가 존재형의 인간이 안 되는가? 성경은 해답을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소유, 즉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결국 누군가를 상처주게 됩니다.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욕심이 없는 겁니다. 자족입니다. 그래서 상처줄 수 없습니다. 그저 그 존재 그대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10. 말씀을 들으며 한 묘비명에 적혀있다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우리는 나와 너라는 존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 나와 너가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어제라면, 가야 할 길은 내일입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와 너의 관계를 바르게 엮어낼 수 있는 사람이 오늘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오늘은 누군가 지나갔던 과거와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토록 후회하고 바꾸지 못한 어제를 오늘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내일은 죽은 자와 같습니다.

또한 분명히 나의 삶이어야 하는데, 내 삶이 다른 누군가가 걸어왔던 삶, 부모의 삶에서 한 발자국도 다르지 않다면 자기 정체성이 사라진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없는 삶 또한 이미 죽은 자의 삶입니다.

10. 그래서 우리는 어제를 살펴보고, 나의 오늘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혁적 정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일은 바로 어제를 바로하는 오늘의 나를 통해 저절로 일구어져 갑니다.

그 내일은 바로 이 땅에서 우리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켜갈 것이 분명합니다. 어제를 올바르게 개혁해가는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1) 어제의 너와 오늘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오늘의 나 혼자만의 힘으로 그 무엇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 창조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사탄의 끝없는 유혹의 마지막은 언제나 “너 하나님과 같은 존재야. 너가 하나님이 되라!”고 유혹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개혁도 내 자신이 가장 뛰어남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제를 존중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그 위에 숟가락 한 개 더 얹는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열왕기부터 역대서까지 왕들은 바뀔 때마다 성경이 누누히 강조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대신하여’입니다.

우리는 윗세대들이 쌓고 깨달은 것들위에 돌 하나 더 올려가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격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에 그저 대신 이 자리를 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누군가의 어제임을 깨달은 사람은 비로소 겸손함을 배우게 됩니다. 겸손은 모든 것의 출발입니다

2) 그제서야 우리는, 나의 내일은 누군가의 현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오늘을 살기 위해 개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개혁 주일이 되면, 종교개혁을 한 루터를 끄집어냅니다. 그의 과거를 답습하고 나눕니다.

물론 그 시대 루터가 말한 종교개혁이야말로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루터에 의해 교회는 완벽해졌어야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회들은 부패해져 갔습니다.

해답 또한 간단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그 자체를 우상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종교개혁 주일을 기념하고 있지만, 무엇을 개혁하고 있습니까?

중세 루터가 말한 개혁의 정신을 과연 오늘 추구하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그 날만을 기념하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시간이 내일 누군가가 살게될 시간임을 알게 되는 사람은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위해 몸부림치게 될 것입니다.

3) 그래서 개혁은 늘 반복적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욕심은 늘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은 커지면 커질수록 부패하고, 진리는 언제나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늘 반복적으로 청소하지 않으면 집이 더러워지듯이 개혁은 죄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언제나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역 초두에 성전에 들어가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에 대해 유대인들이 질문합니다. “니가 뭔데? 표적과 기사를 보여봐라.” 예수께서 대답 하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3년이 지나 공생애 기간이 끝난 뒤, 성전에서 똑같이 그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깨닫지 못한 겁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공생애를 마치기 직전, 다시 한 번 그 성전에 들어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혁은 반복해야 함을, 당신 자신의 몸으로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생각해 봅시다. 교단 안에 갇혀 전혀 변화되지 않은 모습이 정말 없을까요?

4) 마지막으로 개혁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몸소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전을 헐라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헐어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우리가 우리 손으로 자신이 몸담고 잇는 곳을 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허물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복음이고 그래서 그것이 곧 개혁입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시면서 직접 자기 몸을 허무셨습니다.

11.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수많은 초대교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또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1,500년이 흘러 로마 국교가 기독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부패하고, 루터나 칼빈이 등장해 사람 중심의 교회 구조에 맞서 ‘Reformed Church’의 정신이 세워졌어도, 시간이 흐르자 교회들은 또 다시 정체되고 부패해 갔습니다.

12. 바로 교회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개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너’가 한 개혁에 만족하고, ‘너’가 달라지지 않음에 비판하는 시선만 갖추었습니다.

늘 ‘너’는 달라지라 하지만, ‘나’는 어제의 너처럼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내 손으로 내가 만든 것을 허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3. 사랑하는 여러분, 2015년 추수감사주일을 종교개혁 주일로 옮겨와, 감사의 참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한국적인 시간에 맞게 옮기기 가장 적절한 날이 종교개혁주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형식적 이유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움직이는 교회, AMCM 때문입니다.

AMCM은 전임 목사님께서 2009년부터 시작하셨던 교회운동입니다. 움직이는 교회로, 주일이 아닌 평일에 2박 3일 혹은 3박 4일간 전국 어디든, 때로는 해외까지 가서 함께 전도하고 주중 예배를 드리고 오는, 교회가 고여 썩지 않고 움직이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거기에 숟가락 위에 올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AMCM은 보다 어려운 교회들을 찾아가, 주일예배를 섬기고 오는 AMCM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몸부림치며 기쁨으로 스스로를 개혁해갔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 왜 주일예배를 그곳에 가야하느냐고 묻지 않았지만, 내면에는 그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주일 설교를 듣고, 첫 해에 연로하신 권사님들이 결단해서 가시다 사고가 났습니다. 차량 타이어가 터지면서, 폐차될 만한 사고였습니다.

권사님들은 그 사고 후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들 모두, 병원이 아니라 먼저 교회를 섬겨주시고 오셨습니다. 갈비탕을 해 주셨습니다.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밤새 끙끙 앓아 누우셨는데, 제가 걱정할까봐 안 아픈 척 하셨습니다.

병원에 가라는 권함에 “목사님, 믿음에 빠꾸가 어딨어요” 하셨던 권사님. 사고 후 한달 뒤 뇌출혈 수술을 받으셨던 권사님께서는, 깨어나시자마자 “목사님 우리 식구들 밥은요” 하면서 식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셨던 권사님….

치료비를 위로금으로 전달해드리자, 권사님께서 손수 “목사님. 제 믿음 생활에 수십 년에 오점 남기기 싫어요. 너무 감사해요” 하신 권사님. 바로 그분들이 자기 스스로를 개혁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14. 많은 성도님들이 가시면 생명샘교회는 텅 비어 어쩌나, 찬양인도는 어쩌나, 애초에 그런 걱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성도님들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대에게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해 주려면, 내가 나를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셔서 깨달았던 것처럼, 내가 나를 줄 때 비로소 너도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는 ‘나’의 오늘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내일의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제의 너가 아닌, 새로운 내일입니다.

저는 굳게 믿습니다. 정릉 한복판 지하에서 여전히 십 년째 건물 없이 예배드리는 우리 교회지만,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주님의 뜻에 맞추어 비우면 비울수록, 주님의 은혜가 흘러 넘칠 것이요.

우리 외형과 욕심을 매일 반복적으로 허물어갈수록, 주님은 욕심을 세우기 앞장선 시대에 서로를 상처주고 관계가 망가지면서도 모르는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생명샘교회로 올바르게 세워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유한승 달꿈예술학교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15. 이제 다음주 토요일에 상산교회에 찾아갑니다. 성도님들 일곱 분 정도밖에 안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해드릴 것은 부족하나, 주님 사랑을 안고 더 많은 성도님들이 갔으면 합니다.

우리 교회 출석 교인이 약 70명인데, 정말 절반 정도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텅 비어도 좋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테니 마음껏 다녀오시고, 기쁨으로 하나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함께 어제의 너를 개혁한 오늘의 우리가 되어, 내일 누군가가 오늘의 나를 이어갈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어주는, 참된 개혁적 교회를 일구어 가십시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