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6)”.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0-13)”.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그들의 가르침 곧 바리새인들의 완고하고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형식주의와 사두개인의 정치적, 기회주의의 현세적 물질주의를 가리킨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이라는 용어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사복음서, 사도행전, 빌립보서 등에서 약 100회에 가깝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이라는 용어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등에서 약 15회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바리새인이라 함은 ’바리새파에 속하는 교인으로, 성경말씀은 듣고 알고는 있지만 행함이 전혀 없는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사두개인’이라 함은 ‘의로운’ 이라는 뜻의 ‘싸디킴’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원은 솔로몬의 제사장인 ‘사독(삼하 8:17)’에서 유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중류 계층이었던 반면, ‘사두개인’들은 비교적 부유한 귀족층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제사장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민중들을 인도하는 지도자급에 속한 사람들로서,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타인에게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지키기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육신의 부활을 철저하게 믿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며 때때로 지나치리만큼 율법을 강조하여 자신들도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바리새인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일주일에 두 번, 그것도 월요일, 목요일에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과 국가의 운영을 위해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십일조의 의무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세금을 과하게 징수하여 일부는 로마에 바치고 일부는 자신이 착복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세리를 매국노라 지적받고 배신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세리가 사회적으로 구분되는 대표적인 두 부류였던 시대에, 오늘 이 두 사람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먼저 나쁜 사람으로 판단하면서,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자신의 공과 덕을 자랑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저 성전 문 입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겸손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판단과는 전혀 다르게, 이 불쌍한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평화스럽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을 판단하고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사명은 능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남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임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 신앙인들은 편협한 마음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고, 남의 것을 도저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니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삶의 태도에 대해 좋은 가르침과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먼저 성찰하고 반성하며 이웃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좀 늦추는 성숙한 지혜의 신앙인들이 될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새롭게 하는 기도와 찬송과 간증이 필요합니다.

특히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대형교회의 세습 사태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적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통회가 있다면, 먼저 용서를 구하며 모든 것들을 법이 정한 대로 원상회복시킴으로써 문제가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혹 편법으로 이를 수용한다면, 기독교의 미래에 큰 상처를 제공하게 될지 모릅니다. 언제나 이 문제는 가시가 될 것이고, 늘 끊임없는 분쟁으로 인해 복음은 단절되고 성도들과의 신뢰는 더욱 악화되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하여 영광을 가리는 것임을 하루 속히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의 잘못된 언행일치 속에 권력과 부패가 난무한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이들만 항존 직으로 발탁하고 그들에게만 직분을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사실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운영하는 복지재단의 경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이들과 능력자로 발탁해야 하는데, 오로지 자신들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사실 앞에, 이곳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맞는지, 그들의 이중성에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편에 있지 아니한 성도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쫓아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적은 사탄 마귀인데, 어째서 어제까지 사랑하는 성도라고 말하던 이들을 오늘은 적으로 판단하면서 교회로부터 쫓아낼 수 있을까요?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지요?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지만, 지도자들의 이중적인 모순 때문에 믿음은 황폐되고 교회 안은 이리의 소굴로 변질되게 되니, 저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먹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하여, 세상을 향하여 살아갈 때 참으로 좋은 모습으로 세상을 감동시켜 나가는 귀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크리스쳔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