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졸탁동기(啐啄同機)’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병아리가 껍질 안에서 나오려 부리로 알을 쪼으면, 그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부리로 쪼아 서로 그 부딪힘이 일치된 순간에 껍질이 깨어져 병아리가 나온다는 뜻이다.

이를 중생(重生), 회심(悔心)과 빗대어 설명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병아리가 알 밖으로 나오려고 부리로 알을 쪼는 것은 인간이 거듭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몸부림이고, 쪼는 소리를 듣고 암탉이 껍질을 깨뜨려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도록 해 주는 것을 구도자(求道者)의 외침을 듣고 하나님이 그를 거듭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음의 말들을 첨언하며 자신들의 논지를 발전시킨다. “병아리의 유치(乳齒)로 쪼는 것만으론 강한 알 껍질을 깰 수가 없다. 반면에 병아리가 유치로 쪼아대지 않으면 아무리 어미라도 마음대로 알 껍질을 부리로 쪼아댈 수 없다. 부화할 시기는 병아리만이 알기 때문이다.”

병아리와 어미닭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부화가 될 수 없듯이, 사람의 거듭남도 인간과 하나님의 협조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 1962)의 <데미안(Demian)>에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극중 인물 ‘데미안’이 친구 ‘싱클레어’를 떠나면서 남기고 간 글귀이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Abraxas)다.”

작가는 알에서 깨어나 신(神)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오르려는 새(鳥)를 하나님께 오르려는 인간의 종교성에 빗댔다.

헤르만 헤세는 ‘신앙’을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에게 ‘신앙과 구원’은 신을 찾는 인간의 갈망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알미니안(arminian)을 비롯해, 일부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이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통용되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개념 등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 된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전적 무능을 믿는 개혁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죽은 죄인은(엡 2:1) 중생 없이 자력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시 53:2, 롬 3:11).

그들은 중생을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결과로 보지 않고, 중생의 결과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결과이고, 그것의 결정적인 사건이 성육신(聖肉身)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성육신이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영원히 찾지 않았다고 보았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도록 찾으시는 목자의 비유(눅 15:4),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밤중에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고 다니는 여자의 비유(눅 15:8)는 구원을 ‘죄인이 하나님에 의해 찾은바 된 것’을 극화(劇化)한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를 직접 표현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롬 10:20).”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요 11:43) 통해, 죄로 죽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살림을 받는다는 것 말해준다(엡 2:1).

죄로 죽은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그러한 인간의 갈망을 알아챈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준다는 것은 언어모순이다.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가 죽지 않았다는 말이고, 따라서 인간이 죄로 죽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죄로 죽은 인간은 자기가 죽었음을 인식할 수 없고, 구원받고 싶다는 갈망도 가질 수 없다. 죽은 자가 과거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오직 살림을 받은 후이다. 선천적 소경이 눈을 뜬 이후에만 자신이 과거에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중생자(重生者)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것과 비중생자(非重生者)가 단순히 종교에 대해 갖는 호기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후자는 아덴 사람들(Athens)의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을 향한 갈망, 곧 자연인의 보편적인 종교성 일 뿐(행 17:22),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갈망은 특정 종교를 갖게 할 뿐,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하진 않는다(물론 그 중 구원 예정을 받은 이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유턴하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직 복음으로 구원에의 부름을 받은 택자만 하나님을 찾는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 12:3)”는 말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지 않은 자연인의 종교성으로는 예수를 주로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고 한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 없인, 자연인의 종교심만으로는 예수님께로 올 수 없다는 뜻이다.

◈당신의 언어, 수동태인가 능동태인가

신앙을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주도적(人本主義的)’ 신앙은 자신의 의지, 결단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자립적(自立的), 자의적(自意的) 신앙속성을 나타내고 그들의 화법은 주로 화자 중심의 1인칭 화법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과 구원을 하나님에 의해 찾은바 된 결과(롬 10:20)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주도적(神本主義的)’신앙은 하나님 의존적 신앙 속성을 나타내고, 3인칭(하나님) 중심의 화법을 구사한다.

후자는 그들이 최선을 다한 후에도 언제나 ‘그가 하셨다’ 혹은 ‘그가 하게 하셨다’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태(a form, 態)’도 언제나 ‘수동태(the passive, 受動態)’이다. 이런 수동태(the passive) 화법은 은혜의 사도 바울을 위시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 14)”.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수동성’을 말하면, 그것이 풍겨내는 ‘소극성’혹은 ‘로봇처럼 되라는 말인가?’라는 말들을 떠올리며, 그것의 사용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수동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신적 수동(Divine passive)’이기에, 인간 힘에 의해서만 발분된 ‘인간 능동(Human active)’의 적극성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신앙의 ‘수동성’ 장려는 다만 신본주의 신앙을 고양시키려는 것만이 아닌, 우리 신앙이 성령 주도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운 믿음’과 ‘사람의 지혜에 세운 믿음(고전 2:5)’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이냐 아니냐’라는 의미였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믿음의 수동성’으로 귀결된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갈 5:16)”는 성령의존적으로 행하라는 뜻이다. 자의적(自意的)이고 자행적(自行的)인 신앙에는(롬 9:32) 사람의 힘만 역사할 뿐 성령의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냐 믿음으로냐?(갈 3:2)”는 말씀처럼, 성령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영(靈)이다.

사도 바울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빌 3:3)”이라고 한 것도 성령의존적인 수동적 신앙을 말한 것이다.

끝으로 ‘자의성(自意性)’과 ‘자립성(自立性)’이 배제된 하나님 의존적 ‘수동성’ 신앙이어야 할 이유는, 신앙을 바르게 세우고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은데, 말미에 언급한 것은 그것에 중요성 때문이다.

신앙은 시종 “하나님에 의해(by), 하나님으로 말미암아(through), 하나님으로 인해(cause)” 세워져야 한다. 은혜에 인간의 자립(능동)이 첨가될 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처럼 되어 신앙을 못 쓰게 만든다(마 9:16-17).

믿음은 오직 은혜로 세워지고 은혜로 보존된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는 말씀처럼, 은혜에 보탤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보태라고 하지 않고 오직 그의 은혜로 완성시키신다. ‘은혜로 세워진 믿음’에 더할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