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몬1: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비극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소중한 말씀 묵상하겠습니다.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왜 쓰는가. 빌레몬의 종, 노예로 있다가 도망나온 오네시모라는 자를 빌레몬이 용서하고 받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때 '진정한 복음이란 무엇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이해하자면 이 편지에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이 관계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어떻게 대하시는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대하시고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바울은 [고전13장] 사랑의 장에서 뭐라고 하냐면, 내가 아무리 하늘의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3가지는 항상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어야할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빌레몬서에 나타나있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바울의 오네시모를 향한 사랑을 주목해 봅시다.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서 도망간 노예입니다. 그것도 돈을 훔쳐서 도망갔습니다. 그 시대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주인이 그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시대, 그런 시대에 노예가 주인의 돈을 훔쳐간 것은 마땅히 죽일 수 있는 큰 죄입니다. 죽을 죄를 저지른 노예가 오네시모라는 말입니다. 그런 오네시모를 바울이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빌레몬과 화해시키려는 것입니다.

신앙을 하다보면 화해가 정말 중요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게 되는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님과 나의 화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사이 화목의 제물이 되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라고 성 요한 사도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 관계의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죄많은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화해한 자는 뭘 해야하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 그 관계에서 마땅히 화해를 이루며 살아가야합니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이는 어딜 가나 화해케 하고 화목케 하는 자라야 진짜 예수믿는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직책 직분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해야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안에 있는 강한 신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이 편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남 피해 안주고 자기 관리 잘하면서 주일 성수 잘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안에는 뭐가 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누가 그것을 어떻게 보든, 화해는 정말 하나님께 대하여 내 양심에 대하여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불화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해케 하는 일도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때 오네시모는 어떤 자리에 있는가. 빌레몬의 돈을 훔쳐 나와서 도망다니다가 빌레몬을 가르친 바울을 찾아온 것입니다. 바울은 어디있나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거기로 찾아와서 바울이 그를 노예가 아닌 귀한 형제로 인격적으로 성심을 다해 품고 복음을 가르치고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옆에 두고 싶겠습니까. 갇혀 있으니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없으면 안될 사람. 꼭 옆에 두어야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오네시모를 보냅니다.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왜 보내는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형제간에 불화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화해시켜야한다는 것입니다. 내 옆에 두고 내 할 일을 돕는 것보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묵상하면서 우리가 받아야할 도전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진정 척진 관계, 미워하는 관계, 불화한 관계 있으면 풀어야합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의 모든 것을 다 담아서 사랑을 담아서, 정말 부드럽고 겸손한 언어로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와 함께 이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몬1: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 말이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깊은 말입니다. 빌레몬이 이 편지를 받을 때 어땠을까요. "그가 나를 잠시 떠나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 그가 나에게 범한 끔찍한 죄를, 그 배은망덕한 행위들을 사도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반론을 갖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실이었을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정말 나쁘게 하고 갔을지 모릅니다. 그것을 다 아는 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빌레몬이 받았을 상처, 아픔 이런 것도 다 알았을 것입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 상처를 주고 받고, 분노케 하고, 밤잠을 못자도록 힘들게 했던, 그 모든 것을 비극이라고 해봅시다.

그러나 그 비극이란게 뭔가.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그런 일은 '잠시' 있었던 일이라고. 우리 살아갈 날들, 우리 영원을 사는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잠깐' 있었던 일이라고.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일은 참 힘든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 일을 통해서 영원히 그와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불화한 관계가 화해케 되면 정말 더 깊은 관계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비극이란 것은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천박한 관계, 천박한 평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서로 만나면 인사하고 웃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 욕하고 속으로 미워하고 정죄합니다. 이런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 어느 집안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나면 늘 함께 밥도 잘먹고 잘 지냅니다. 무슨 안좋은 일이 있어도 그것은 가족 중에 아는 사람만 알고 그렇게 지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된 평화인가.

겉으로만이 아니라 속으로도 진정으로 믿고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하나되어서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면에서 늘 우리 속마음을 주목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산상수훈 말씀 중에,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마다 돌로 침을 당할 간음죄를 저지른 것이요. 형제를 속으로 미워하고 욕하는 자마다 대법원에 끌려갈 것이요. 그러니 미운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미워하고 욕하지 말고 차라리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왜? 가식되고 거짓된 것보다 차라리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글이 그렇습니다. 서로 안보이는데서 욕하고 미워하고 살지 말고 만나서 풀고 진정으로 하나되어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런 불미스런 일, 상처를 주고 받고 했던 일들이 분명 힘든 일이었지만 그러나 서로 잘 이해하고 잘 풀고 더 잘 지내라고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아닌가. 이 말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비극의 상황을 더 좋은 미래를 열기 위한 것으로, 더 좋은 일이 있기 위한 것으로 삼켜냅니다. 녹여냅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 가운데 깊이 들어오면 우리 안에 모든 어둠의 영은 사라집니다.

최근 여러 성도님들을 만났습니다. 대화도 깊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사정을 더 잘 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자기가 뜻하지 않게 괴로움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들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 세계가 다가왔습니다. 사람이 오해받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나의 선의가 묵살될 때, 내가 마음을 열었을 때 그는 나를 정죄하고 공격했을 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많은 상처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치유되고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며칠 전에 무슨 증서를 갱신하려고 구청에 갔습니다. 화장실에 가면 붙여져 있는 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깊이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와서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고통'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내용이 "아득히 돌아보면 나의 고통,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경멸했을 때 훗날 나도 잠시 그가 되어서 받는 고통" 그러면서 시의 마지막이 이렇습니다. "내가 받는 고통은, 사람은 누구든 남을 멸시하지 않아야함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내가 받는 고통 속에서 남이 받았을 고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을 때 다른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더 잘 위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잘 위로하라고 내게 주신 고통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사람이 이유없이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상대에게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비판을 받습니다. 한참 동안 몰랐습니다. 자기가 받는 박해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날 알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시기나 질투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요셉을 알게 되었고 다윗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고. 성경이 읽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온 것인가. 믿음의 선진들을 더 알게 하시려고. 예수를 더 잘 알게 하시려고. 그래서 더 사랑하라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위로하라고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 바울 안에 우리 삶의 모든 비극을 넘어서게 하는 소중한 신앙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가 잠시 떠난 것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와 잠시 불화했던 것은 영원히 그를 사랑하고 하나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에게 그런 일이 없었으면 오네시모가 어떻게 바울을 만났겠습니까. 어떻게 복음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변화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비극은 영원한 기쁨,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함이 아닌가.

사도 바울의 이런 시각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자들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성,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그의 선하신 뜻대로 다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저런 문제들 상처들 고통스런 경험들이 있어도 그건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힘들고 괴로운 것들을 다 바꾸셔서 더 좋은 세계로, 더 기쁜 세계로 인도하신다는 것.

[요9장]에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예수님이 고치실 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로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불행한 인생을 바라볼 때,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누가 잘못해서 이 사람이 이런 저주, 벌을 받은 것입니까" 질문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히 부모나 조상의 잘못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가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런 자가 신앙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잘 이겨서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현재의 비극을 미래의 영광의 빛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도 이런 일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힘들게 태어난 아이.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비관에 빠질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를 통해 이루실 미래가 있다는 것.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이 있다는 것. 그런 믿음으로 그를 바라볼 때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에 비극이 있습니까. 불행이 있습니까. 상처받고 괴로웠던, 억울하고 힘들었던 일이 있습니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통치 안에서 다 바꾸셔서 더 깊고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여러분 모든 비극을 넘어서길 바라고, 이 믿음 가지고 우리 안에 모든 미움과 갈등 다 풀어내고, 사도 바울과 같이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를 써나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