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더러
1. 순서대로 본문을 정해 설교하는 이유는 늘 감정적이면서도 부족한 제가 앞서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섭리 안에, 주시는 말씀 그 안에 담긴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감동받고 제가 전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는 욕망 대신, 주신 말씀을 순서대로 전하는 것 안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바른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바라며 순서설교를 한지 9년째입니다.

주일 11시 예배에 지난주 주어진 지난주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20장 19-20절에 나오는 ‘닫힌 문 뒤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내용입니다.

굳게 닫아버린 문 안에 제자들의 두려움과, 아픔, 고통, 그러면서 끼리끼리 되어가 결국 꿈도 사랑도 잃어가는 모습을 묵상했습니다.

적절한 사례가 떠오르지 않았던 상황에서, 뮤지컬 <머더러(Murderer)>를 보러 갔습니다. 출연진도, 내용도, 심지어 장소도 출발하면서 검색해봤을 만큼, 큰 기대를 하고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뮤지컬 <머더러>의 내용은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부족한 저를 위해, 언제나 열일 하고 계심을 또 한 번 느낍니다.

2. 뮤지컬 <머더러>는 5명의 아이들이 전쟁 후 수용소에서 갇힌 채 탈출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소망 없는 아이들 5명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순수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극심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대로 탈출하지 못하리라는 절망 속에서 지냅니다.

그때 한 어른이 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며, 구출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두려움 반 기쁨 반으로 대답합니다.

“문이 잠겨져 있어서, 우리 스스로 열 수는 없어요”라고.

어떤 사람인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른은 아이들의 말을 듣고는, 반드시 잠긴 문을 열고 구원해 주겠다며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굳게 닫혀서 스스로 절대 열 수 없는 죽음의 문 안, 그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 5명에게, 보이진 않지만 구원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줍니다. 그리고 소망을 줍니다.

“다시 올거야. 꼭 돌아올거야.”

반드시 열어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누군가는 의심하지만 누군가는 소망을 갖자고 말합니다. 절망의 순간, 직접 보이진 않지만 아이들에게 구원의 음성이 들린 겁니다.

복음입니다. 이쯤부터 요한복음 20장 19-20절을 설교해야 하는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것을 보게 하셨구나, 확신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집중이 되었습니다.

3.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룰을 만듭니다. 주어진 비스켓을 정확히 하루에 다섯 조각씩 나누어 먹기로 하고, 물도 나누어 마시기로 합니다. 서로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곤 있지만, 그래도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기꺼이 나누어 먹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뀝니다. 수용소 안에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한 어린아이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탄탄해 보이던 친구 사이가, 깨지기 시작한 건 비스켓 한 조각, 물 한 모금 나누어 먹는 것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소망 안에 불안이 싹트더니, 믿음이 의심과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5명이 6명이 된다는 것은 불안한 숫자 6을 상징하고, 결국 과자 6조각과 결합돼 666이라는 안 좋은 숫자까지 이어질 거라고 말입니다.

4. 작품은 얼핏 보면 다수의 의견이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품을 보면서 더 깊은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모든 인간 내면의 추악한 욕심을 보여줍니다.

5. 아이들은 금세 확신이 사라집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증폭될수록 나타나는 현상은 소망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지니 커져가는 것은 비스켓 하나에 대한 욕심입니다.

아이들은 결국 자기 불안으로 만든 미신과, 드러나지 않은 자기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룰을 만듭니다. 투명인간 놀이를 통해 한 명을 제비뽑아, 나온 사람을 그룹 내에서 제외시키는 투명인간 게임입니다. 게임이 너무 무섭습니다.

결국 룰대로 투명인간을 뽑았는데, 뽑힌 투표 결과를 앨런이라는 주인공이 버리고 맙니다. 모두가 항의하지만, 앨런은 이런 게임으로 누군가를 벌할 수 없다고 합니다.

6.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투표결과에는 앨런이 사랑했던 앤이 나와있었습니다. 극중 주인공 격인 앨런과 앤은 작품 내에서 공동체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둘 모두 어른스러우면서도 아이 같은 면모를 모두 지닌, 균형잡힌 캐릭터 같습니다.

비슷한 면이 있는 그 둘은 서로에게 끌립니다. 서로 밤에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같은 고민을 하고 그러다보니 추억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다 생긴 감정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남자로 보이던 앤이 이제 앨런의 눈에는 여자로 보입니다. 뜨거운 사랑을 느낍니다. 12살의 나이에 말이지요. 우정 너머에 있는 감정인 사랑은, 이 둘을 아름답고 예쁘게 만들어 갑니다.

7. 모든 관계는 발전하게 됩니다. 어느덧 투명인간 뽑기는 잊혀집니다. 그리고 앨런과 앤의 결혼과 사랑의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여전히 이들의 나이는 12살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도 그러지 않냐며,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곤, 우리가 있어야 할 더 좁은 우리만의 장소가 필요하다며, 닫힌 문 안에서 더 좁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앨런과 앤은 누구보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듯 했지만, 지금은 서로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가장 약한 아이가 있던 장소, 그러니까 원래 새끼 여우가 있던 그 장소를 자기들의 보금자리로 정합니다. 그리곤 거기에 들어갑니다.

8. 그 날 밤 새끼 여우는 친구들에 의해 죽게 됩니다. 다음날이 되어 앨런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새끼 여우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곧바로 구출을 약속한 어른이 돌아오지만 앨런은 문 밖으로 나서지 않겠다고 합니다. 결혼까지 한, 이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앤이 부르는데도, 그 손을 잡지 못합니다. 새끼 여우와 있겠다는 것입니다.

앨런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의 선택으로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 그 사람과 함께있는 동안,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원래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뒤늦게 압니다. 나는 누구 옆에 있어야 하는지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9. 다시 뮤지컬 제목으로 돌아가봅니다. Murder, 살인자. 과연 누가 살인자일까요?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 추악한 살인범을 영화 내에서 못 찾고, 카메라 렌즈, 그러니까 시청자들이 바라보는 화면을 쳐다보며 끝나는 그 장면은 “너, 네가 범인이지?”라고 묻습니다.

이 뮤지컬도 묻습니다. “누가 살인자야?” 뮤지컬 속에서 새끼 여우를 직접 때린 여러 사람들만일까요? 아닙니다.

두려움이 가득하고 가장 약한데도 더 약한 존재를 괴롭히려고 한 토미,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둘만 사랑하겠다며 서로에 취해 새끼 여우를 내쫓은 앤?

아니요,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애초 뮤지컬의 설정에서, 새끼 여우를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은 앨런입니다. 결국 결정적 상황에서 새끼 여우를 포기하고 앤을 선택한 앨런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투명인간 뽑기에서 투표로 나왔던 앤을 자신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감추고, 새끼 여우를 보호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음에도 중요한 순간에 자기 욕망대로 사랑을 재해석한 앨런이야말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10. 뮤지컬은 그래서 닫힌 문 안에 남은 사람은 여전히 앨런 혼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두 문 밖으로, 빛으로 나간 그 상황에서 앨런은 문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다르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뮤지컬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극을 보고 있는 당신은 다른가?

11. 우리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숙명임을 압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자기 욕망대로 사랑을 해석하여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버리고,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욕망의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끼 여우를 사랑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을 사랑으로, 그 사랑을 위해 감추는 것이 사랑이 되어 버렸으니 그 사랑이 사명이 된 사람의 사역은, 사랑이 아닌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유화된 사랑은 욕심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욕심은 죄로 이어집니다. 죄는 사망입니다.

12. 요한복음 20장으로 돌아가 볼까요.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알았으니, 부활을 경험하고 문 밖으로 나가 증인의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무덤 안에서 텅 빈 무덤을 확인한 결과, 이들은 자유했어야 합니다. 이제 증인으로, 부활을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저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리아만 끝까지 남아, 텅 빈 무덤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통해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굳게 닫힌 무덤의 문을 스스로 열고 부활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가 여러분의 아버지래요, 내 하나님이 당신들의 하나님이래요.”

13. 놀랍게도 이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사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가서 부활을 증거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던 말씀을 구현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들의 선택은 문을 걸어잠그는 것입니다. 왜 잠궜는가에 대해, 성경은 기가 막힌 표현을 합니다.

“유대인이 두려워”.

두려움과 불안. 의심에 가득찬 그들은 스스로 문을 걸어잠그고 말았습니다. 그 안에서 여전히 불안과 공포,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치유되지 않은 채,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로 무덤으로 향하던 발걸음처럼, 누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그 시선으로 서로를 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굳게 닫혀있는 현장에, 예수님꼐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4. 뮤지컬 <머더러>를 해석하는 관점이야 다양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걸 알 때, 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1816년, 프랑스 전투함인 메두사호가 가라 앉으면서, 장교들은 탈출하고 15명만 뗏목 위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인육을 먹었던 실화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제리코라는 화가가 직접 시체를 보며 연구해, ‘메두사호의 뗏목’이라는 엄청난 작품을 그려냈고, 이 작품을 다시 독일 태생의 극작가인 카이저가 희곡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원작인 희곡을 살펴보니 여기는 13명의 어린이가 등장합니다. 배경은 뗏목이지요. 여기서도 어린이들은 그러나 똑같습니다. 13이라는 미신적인 숫자와, 새끼 여우를 책임지기 싫어하는 구성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원작 희곡에서의 앨런은 뮤지컬에서처럼 나머지 살인자인 아이들을 보내고 자신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앨런의 마지막 대사가 이렇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될 거예요. 애들 때 벌써 어른들 같으니까요.” 그래서 뮤지컬에서도 그와 같은 대사가 있습니다.

15. 이 말은 우리에게 이렇게 들려야합니다. “교인들도 세상과 똑같이 될거예요. 교회 안에서도 세상과 똑같으니까요.”

교회를 다니면서 선생님이건 사역자건,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빵 한 조각 가지고도 다투고, 나누어 먹고 싶은 사람하고만 먹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을 자기 유익에 따라 선택할 때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듯, 교회가 세상과 같은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 교회의 힘은 사라집니다. 그럴수록 문은 더 굳게 닫힌 채, 끼리끼리가 되어가겠지요.

배경은 달라지겠지요. 아주 오래 전 군함일 수도, 혹은 세월호와 같은 유람선일 수도, 감옥 안일 수도. 그런데 교회 안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들의 가정일 수도, 그보다 더 작은 단 둘의 은밀한 공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시나요. 그곳은 여러분이 열지 못하는 문으로 잠긴 채, 죽음을 기다리는 끼리끼리의 문 안일 뿐입니다. 그 ‘끼리끼리’는 분열을 내포한 위조된 사랑. 그래서 모두를 ‘머더러’로 만드는 문 안일 수 있습니다.

부디 그곳에 제자들이 굳게 닫은 문 안으로 홀연히 들어가 “평안하라” 하신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채워져, 세상에서 자유하고 닫힌 문을 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6. 뮤지컬 <머더러> 노래 중 ‘모르겠어’라는 넘버의 가사 중 일부분을 마지막으로 소개합니다. 이 노래 가사처럼, 부디 여러분의 생각이 멈추고 세상까지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르겠어 그냥 널 보면 기분이 좋아 그냥 널 보면 웃음이 나
모르겠어 그냥 함께 걷고 싶은건
모르겠어 내 머리가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어 그냥 널 보면 세상이 멈춰

13. ‘새끼 여우를 책임져야 했던 앨런이 왜 그렇게 됐어야 했는지. 그저 모르겠어’. 그냥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어지고, 세상까지 멈췄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스도인에게 멈춘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복잡하고 전쟁같은 세상에, 반드시 그 분은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이 살면, 여전히 문을 걸어잠그고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가두고, 서로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내게 주신 것을 나누어야 할 대상과 나누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먼저 내 가족, 먼저 내 애인, 먼저 내가 좋아하는 친구. 여러분, 그러다 새끼 여우는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시 오실 그 분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비롯됩니다. 아니! 이미 여기 오신.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닫힌 문 안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사랑해야 할 지체를 데리고 얼른 또 다른 닫힌 문을 열어주는 참된 자유의 사람이 되시기를. 복음이 멈추지 않기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디모데후서 2장 7절)”.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