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국제꽃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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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0장 25-37절

유추프라카치아

아프리카에 가면 음지에 사는 식물 중에 ‘유추프라카치아’라는 식물이 있다고 합니다. 이 식물은 극소량의 햇빛과 극소량의 물로만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다음 날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이 식물이 왜 건드리기만 하면 죽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식물학 박사님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식물이 왜 죽었는지, 이 식물을 살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아냈습니다.

이 식물을 살리는 방법은 오늘 만졌던 사람이 내일도 만져주고, 모레도 만져주고, 매일매일 만져주는 것이었습니다. 곧 ‘유추프라카치아’는 관심을 계속 받으면 죽지 않는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식물만 그렇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이든 그 사람을 향한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시들시들 해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빈곤을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나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너’가 아니라 ‘나’라고 가르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보다 그들을 제치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광고들은 끊임없이 ‘중요한 건 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상품, 옷, 차, 집, 이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타적인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 말씀에 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와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지를 되묻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답이 옳으니까 그 말씀대로 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자기를 조금 더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이 때,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을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때리고는 버리고 갔습니다. 마침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 사람에게 응급조치를 취하고 짐승에 태워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 이 사람은 급하게 떠나야 했기에,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꼭 주막에 들러서 갚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 사람을 잘 좀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율법교사에게,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당연히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외면해야 할 사람이 이웃이 되어준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갔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피해가 될까봐 강도만난 사람을 피해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고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을 혼혈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강도 만난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쳐야 했던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은 유대인을 돌보아 주고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웃의 기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잇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질문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냐’라고 질문한 것은 이웃의 개념을 제한하려고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곧 율법교사는 내 주위에 있는 나와 관계된 사람정도가 네 이웃이라는 대답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이웃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율법교사는 이웃의 대한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지만 예수님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기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작은 관심이 사람을 살린다

우리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우선된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작은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 관심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마리아 사람마저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쳐 버렸다면, 이 사람은 죽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관심이 이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위대한 만남, 위대한 순간을 꿈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서 위대한 일을 성취할 날을 꿈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우리가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순간, 위대한 만남은 나도 모르게 왔다 가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사소하게 생각했던 그 순간, 그 만남이 위대한 순간으로 위대한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작은 관심은, 작은 만남은 작은 일로 그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때로 그 작은 관심이 나의 인생도 남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관심으로 인생이 바뀐 존 쑤오 이야기

2016년 12월에 케냐 나이로비 시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린 존 쑤오는 매일 행인에게 구걸한 돈으로 작은 빵 조각을 사서 배를 채웠습니다.

존은 어느 날처럼 구걸을 하기 위해 도로 갓길에 주차된 차로 다가갔습니다. 당시 차 안에는 글래디스 카만데(Gladys Kamande)라는 여성이 타고 있었습니다.

돈을 받기 위해 차 안으로 손을 뻗은 존은 잠시 뒤 글래디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글래디스가 휴대용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존은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그녀에게 “왜 그걸 끼고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글래디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고로 폐가 망가졌단다. 나는 이게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단다.”

존은 글래디스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서는 “제발 이 분의 병을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후, 글래디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보다 힘든 사람은 처음 봤어요. 매일 구걸하면서도 저는 한없이 불쌍해져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느끼죠. 그런데 죄송해요 내가 가장 힘든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신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존은 이렇게 말을 하고서, 주머니에 있던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글래디스에게 건넸습니다.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얻은 소중한 돈이었지만, 자신보다 그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글래디스는 웃으면서 존에게 ”너무 고맙지만 나는 그 돈을 받을 수 없구나“라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한 한 시민이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뒤 자신의 SNS에 이 장면과 이 사연을 공개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이 사연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케냐의 한 기부 사이트에는 글래디스의 수술을 위한 모금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2억원이 넘는 돈이 모였습니다. 이후에 글래디스는 인도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새 삶을 살게 도와준 존을 찾아 입양해서 현재 존과 글래디스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장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존이 나보다 더 불쌍하다고 생각한 글래디스에 가진 작은 관심과 눈물이,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내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

우리는 흔히 구제를 하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 때문에,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면, 나에게 손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구제하는 사람을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면 나도 윤택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곧 남을 구제하고 윤택하게 하는 것은 곧 나를 풍부하게 윤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섬길 수 있을 까요?

첫째, 그냥 이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도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제 기억으로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는 나, 너, 우리, 대한민국 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어교과서를 만드신 분이 어떤 의도로 이 단어를 가장 먼저 배우도록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나도 중요하고 너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 중요하다.’ 나와 너 보다는 ‘우리’라는 말이 왠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느 대학 교수님이 ‘우리’라는 단어만 생각하면 상호라는 학생이 늘 떠오른다고 합니다. 상호는 교수님이 지도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장학금 수혜 문제로 자주 상담을 하곤 했습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상호가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교수님께 해주었습니다.

“교수님, 저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비행 청소년이었습니다. 세상이 싫었고 사람들이 싫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반항했죠. 그렇지만 속으로는 너무 외로웠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무척 잘해주셨는데도 저는 계속 말썽만 피웠어요.

그런데 한 번은 방과후에 패싸움을 하고 머리가 터져서 왔는데, 그 선생님이 붕대를 감아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우리 상호 피를 많이 흘리네. 어떡하지?’ 그냥 상호가 아니라 ‘우리’ 상호라고 하셨어요. 그 말, ‘우리’라는 말이 제 가슴을 때렸어요. 그리고 저는 정신 차리고 새롭게 인생을 출발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더 가깝고 친근감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부모님, 우리 아이들, 우리 교회. 저도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이라고 칭해주시면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웃을 그냥 이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더 친밀감을 가지고 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이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려면,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곧 내가 그 사람이 되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내 아픔과 슬픔만 생각하고 상대의 아픔과 슬픔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만 괜찮으면 상대야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영혼을 살리는 데까지 가야 한다

우리가 우리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서 저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때로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이웃의 영혼까지 가야 합니다.

주위에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구원해야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있게 하신 것은 그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들을 섬기십시오. 여러분의 관심과 섬김을 통하여 그 영혼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만약 내가...

에밀리 E. 디킨슨이 쓴 ‘만약 내가’라는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저는 여기에 다가 한 줄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 관심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힘쓰고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이웃에게 작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헛되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쓰고 있다면, 우리는 헛되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작은 관심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작은 관심이 그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나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관심을 많으시고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관심과 사랑으로, 우리 이웃에게 늘 관심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희망도 습관이다’ ‘동행의 행복’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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