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기 내전기
갈리아 전기/ 내전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 박석일 역 | 동서문화사 | 528쪽 | 10,000원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8년만에 만들어냈다
총 8권, 카이사르가 7권까지 직접 기록

고대 로마 제국의 전성기 영토는 대단했다. 동쪽으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서쪽으로는 시리아(그 옆이 중동이라고 불리는 이라크다),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 북방, 북쪽으로는 지금의 독일과 영국 브리튼 섬까지였다.

이러한 대단한 영토를 가진 고대 로마. 그 과정을 나타내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속담처럼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제국의 영토가 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대제국 영토의 기틀은 단 8년 만에 만들어졌다. 그것도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기>는 그 8년의 기록이다.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지역을 말한다. <갈리아 전기>는 카이사르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 출판한 기록이다.

이 책은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7권까지는 카이사르가 직접 기록했다. 이후 8권은 갈리아 원정 때 동행했던 친구이자 비서였던 히르티우스가 기록했다.

1권
로마 속주 총독이던 카이사르
헬베티족 집단 이주 막아서다
게르만족 막다 갈리아 통치로

기원전 58년.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로마 속주의 총독이었다. 그가 다스리게 된 속주는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 지역이었다. 1권에는 갈리아 원정을 시작하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사건은 헬베티족의 이동이다.

당시 헬베티족이 살던 곳은 지금의 스위스 지역이다. 그곳은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로마 속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위쪽으로는 게르만족과 닿아 있었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게르만족과 충돌해야만 했다. 그래서 헬베티족은 그 곳을 떠나 서쪽으로 집단 이주를 결정한다.

2년간 집단 이주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준비가 완료되자 각 개인의 건물을 비롯하여 12개 도시와 400곳에 이르는 마을을 전부 불태웠다. 곡식도 휴대할 수 있는 양만 남기고 모두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앞날의 고생에 대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퇴로를 막아 버렸다. 그렇게 3개월치 식량만 지니고 집단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헬베티 족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곳이었다. 하나는 좁은 계곡을 지나서 가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속주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결국 로마의 속주를 지나가기로 결정했고, 이를 허락하지 않은 카이사르와 싸움을 하게 된다. 그 싸움에서 헬베티족은 패배하고, 다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러나 그 방향이라고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나가고자 하는 길에는 여러 부족이 있었다. 그 부족들은 헬베티족의 이동을 곳 침략으로 생각했다. 그 중 길목에 있던 하이두족은 헬베티족을 막기 위해 카이사르의 도움을 요청한다. 이렇게 갈리아 인 지역에 카이사르의 영향이 커지게 되었다.

결국 헬베티족은 패배하고, 원래 살던 지역인 지금의 스위스 지역에 정착하며 카이사르의 통치를 받게 된다. 실제로 지금의 스위스인들의 조상이 헬베티인들이고 스위스의 정식 국호는 헬베티 연합이라는 뜻의 ‘Confederatio Helvetica’이다.

이후 하이두족은 게르만족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한 번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 곳곳에 군대를 보내면서 갈리아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게 된다.

2권은 벨가이족과의 전투
4-5권은 브리튼섬 원정기
6-7권은 대규모 반란 진압
정복 후 루비콘 강 건너다

2권은 그 다음 해인 기원전 57년에 있었던 갈리아 원정기다. 이때는 당시 갈리아 지역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벨가이인과의 전투였다. 그들이 살던 곳은 갈리아 지역 북서쪽이다. 벨가이인들은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주변 게르만족과 함께 카이사르에 대항했고, 카이사르는 벨가이족 지역을 복속시켰다.

이후 8권까지 매년 갈리아 인들의 봉기와 점령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 4권과 5권에는 지금의 영국 브리튼섬에 대한 원정 점령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기원전 53년과 52년의 기록인 6권과 7권은 갈리아 인들의 대규모 반란과 진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런 8년에 걸친 갈리아 지역 정복을 통해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특히 8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함께한 10개 군단은 사실상 카이사르의 사병이 되었다.

이를 염려한 로마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들은 카이사르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했고, 결국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게 된다.

당시 갈리아 사람들 풍습도 기록
당사자 기록임에도 기본 사료로
뛰어난 라틴어 문체, 예술적 평가
미사여구 없이 사실 위주로 기록

<갈리아 전기>는 로마가 어떻게 유럽을 정복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더욱이 카이사르는 당시 갈리아 사람들의 풍습과 생각 행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말했다.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 동안 전개된 갈리아 전쟁을 서술할 때, 이 전쟁의 주인공 카이사르가 직접 쓴 <갈리아 전기>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할 수 있는 사람은 고금을 막론하고 한 명도 없다. <갈리아 전기>는 참고 사료가 아니라 기본 사료다.”

또 하나 후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갈리아 전기>의 라틴어 문체다. 물론 한글 번역으로 읽은 나는 라틴어 문체의 뛰어남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웅변가라고 하는 키케로의 말을 통해 <갈리아 전기>가 뛰어난 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갈리아 전기>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 “이 책들은 모두 알몸이고 순수하며, 인간이 몸에 걸치는 의복과도 비슷한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졌을 때 보이는 매력으로 충만해 있다.”

일본인 고바야시 히데오는 <갈리아 전기>를 문학작품이 아니라 고대 미술품과도 같다고 말했다. 실제 한글로 번역된 책을 읽었을 때도 제일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간결함과 리듬감이었다.

엑소더스
▲영화 <엑소더스> 초반부 대규모 전투신. ⓒ영화사 제공
카이사르 본인이 쓴 전쟁기인데 지나치게 담백하다. 글에서 감정적 표현은 절제되어 있고, 역사 기록 특유의 과장이 없다. 또한 본인이 직접 기록한 본인의 전쟁기인데 삼인칭을 쓰고 있다. 저자를 몰랐다면, 카이사르가 썼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다.

물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카이사르의 의도적 기법이라고 말한다. 자화자찬으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은 빼고, 사실 위주로 기록한다. 그러면서도 로마 시민들이 좋아할 만한 전쟁의 묘사나 승리. 그 과정에 발생한 토론과 외교등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난다.

즉, 이미 승리한 전쟁이기에 굳이 자신을 높이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대로를 전달한다는 느낌이 오히려 카이사르를 돋보기에 만들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갈리아 전기>를 카이사르의 ‘여론 조작’이라고까지 말한다.

‘여론 조작’이라는 극단적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여론 몰이’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정적들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던 상황에서 <갈리아 전기>를 통해 카이사르는 로마의 영웅이 되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로 시작된 로마의 유럽 정복. 고대 로마의 역사적 사료. 아름다운 라틴어 문체. 카이사르의 정치 입지를 다지게 만들어 준 책. 이상이 <갈리아 전기>를 이야기 하면서 꼭 빼놓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객관적 불리한 전황, 3가지 전략 극복
1. 정보전 2. 유리한 지형 3. 승리 확신


그리스도인 영적 전투에 적용하면
1. 말씀으로 영적 정보전 승리
2. 기도와 예배의 자리 지키기
3. 죽음 이기신 예수님 의지해

그러나 <갈리아 전기> 속에 나타난 병법도 관심이 가는 주제다. 카이사르의 전투는 객관적으로 보면 불리한 싸움이다. 일단 로마는 원정군이다. 그리고 적에 비하면 병력도 적고, 현지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전투에 승리했다.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만들어낸 카이사르. 그 속에는 세 가지 필승의 전략이 있었다. 이러한 필승 전략은 성도의 영적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첫 번째 정보전이다. 카이사르는 항상 적의 동향, 적의 의도에 집중했다. 자신이 다스리던 속주에 돌아가서도 늘 갈리아 인들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을 시작하면 반드시 포로들에게서 정보를 캐냈다. 적의 지금 상황은 어떤지, 적의 계획은 무엇인지. 어디에 적이 있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그리고 항상 정찰병을 운용했다. 그래서 적의 상황을 파악하고, 유리한 지형을 꼼꼼히 살폈다. 이러한 정보 수집이 ‘원정’이라는 불리한 여건도 극복하게 만들었다.

성도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영적 정보전에서 승리하기 위함이다. 말씀에는 사단의 전략이 여러 곳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중에서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나의 행동과 말이 원수 맺게 하는 것은 아닌지, 분쟁과 시기는 아닌지, 분냄과 당 짓는 것은 아닌지. 그런 모습이 내게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공격이고 전략이다. 그것을 미리 파악하고 대비하면 된다.

말씀이라는 정보 없어 전투에 나가면 패배한다. 적의 공격은 ‘분냄’인데 그것도 모르고 화를 내면서 ‘승리하고 있다.’고 오해한다. 영적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말씀의 정보전이다.

두 번째 카이사르의 승리 전략은 지형이다. 카이사르는 절대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지 않았다. 갈리아 인들은 카이사르의 군대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늪지대나 숲속으로 숨었다.

혹은 높은 곳에 있는 요새에서 방어 했다. 그러면 카이사르는 절대 그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혹여나 공격하더라도 필승의 전략을 준비해서 들어갔다.

높은 성벽이 있으면, 성벽보다 더 높은 망대를 만들어서 공격했다. 늪지와 숲 속에 있으면 적이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도록 유인했다. 어떠한 경우도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영적인 전쟁도 승리할 수 있는 지형이 있다.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가 그것이다.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도 기도로 시작한다. 단지 시작을 알리는 절차가 아니라 정말 기도로 시작한다. 회의의 자리를 기도의 자리로 만든다.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 1시간 일찍 출근해서 큐티를 하고,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직장의 자리를 개인 예배의 자리로 변화 시킨다. 그러면 승리할 수 있다.

단지 기도가 시작을 알리는 국민의례가 되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말씀 묵상이 숙제가 되어 버리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로 시작할 때, 삶의 현장은 기도의 현장이 된다. 그때 영적인 승리가 가능하다.

세 번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다. 아무리 갈리아인들이 많이 공격해 와도, 로마 군인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카이사르가 자신들을 돕기 위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올랐다. 불리한 싸움을 단숨에 역전시켜 버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성도는 인간적인 영웅 카이사르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삶은 아픔이다. 영적 전쟁뿐 아니라, 많은 갈등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때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죽음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부활을 우리에게도 약속하셨다.

이제 죽음도 성도를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죽음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 찾아온 아픔에 패배할 이유가 없다. 아픔은 온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승리할 것이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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