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들이 있다. 자유란 매우 기독교적인,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유를 잃거나 천박하게 전락시킬 수 있다.

기독교적인 자유의 의미는 첫째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핏값으로 대속하신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결코 모든 이들이 자유롭지 않았다. 특정인, 혹은 집단의 자유를 위해 다른 이들의 자유는 희생당하는 구조였다. 왜냐하면 그 특정인, 혹은 집단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당신의 형상을 담아 존귀하게 지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를 다시 확증하셨다.

따라서 둘째는,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유란 방종이 아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타락한 구조와 질서에 순응해 살아가는 상태를 자유라 할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도, 선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자유의 가치를 존중해 온 국가다. 물론 우리나라가 성경적이고 궁극적 자유가 구현된 나라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많은 굴곡과 파고 속에서도 꾸준히 그 지향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이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최근 너무나 활개를 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거대한 몸집으로 압박하고, 북한은 민족감정과 온갖 선전선동 전술로 뒤흔든다. 이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반(反)자유 세력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이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 자유가 확대돼 온 역사다. 이 자유를 향한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수많은 부침을 겪고 때로는 후퇴한 것 같아 보여도, 거시적으로 봤을 때는 멈추지 않고 전진해 왔다. 아니, 하나님께서 멈추지 않고 전진시키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피와 눈물을 쏟아 왔고,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북한 주민들을 위해, 홍콩의 시민들을 위해, 우리나라와 전 세계의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외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