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5가지 원리
오직 성경, 인간의 탐욕이 짓밟은

하나님 말씀 되찾으려는 욕구 발현
교리의 의미와 역사적 상황 설명

종교개혁의 5가지 원리
제이슨 앨런 외 | 조계광 역 | 생명의말씀사 | 176쪽 | 12,000원

들어가면서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데오도 베자(Theodore Beza)의 이 선언은 종교개혁이 무엇인지를 판가름하게 한다. 루터의 의해 촉발된 교회 개혁은 발화한 씨앗처럼 성장을 멈출 수 없고, 계속 그리고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미 개혁되었는데, 어떻게 항상 개혁되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 명제를 역으로 읽어야 한다. 개혁되었지만 인간은 언제나 퇴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개혁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성도는 거듭났으므로 계속 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혁은 필연이며, 거듭난 자들의 숙명이다. 그렇기에 개혁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싸우는 거룩한 전쟁이자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려는 영적 몸부림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교리와 교회의 개혁인 동시에, 탐욕과 나태에 안주하려는 게으름과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너무나 익숙한 제목이라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필자 자신에게 ‘오직 성경으로’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을 던졌다. 답을 할 수 없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왜 ‘오직 성경’을 외쳤던 것일까?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권위가 아닌 ‘오직 성경’에만 권위를 두기 위해? 그것이 전부일까? 다른 의미는 없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단 한 번도 다섯 SOLA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공부해 본 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정리한 적도 없었다.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익숙했을 뿐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다시 다섯 가지 명제를 읽어보자.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다섯 명의 공저자들이 다섯 가지 명제에 대해 한 편씩 기고한 형태로 저술된 책이다. 간략하고 명료하기에, 종교개혁의 핵심을 잘 짚어준다는 점에서 신학을 처음 시작하는 신학도와 일반 교인들에게 딱 맞는 수준이다.

물론 필자와 같이 종교개혁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하지만 단 한 번도 다섯 ‘솔라’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보지 않은 목회자들에게도 좋은 책이 분명하다.

왜 ‘오직’이 들어가야 하는가?


다섯 ‘솔라’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살펴보자. 다섯 ‘솔라’는 왜 중세 교회로 남아있지 않고 개신교라는 교회로 갈라서야 했는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제이슨 앨런은 ‘시작하는 글’에서 ‘오직’이 갖는 의미를 들려준다. 중세 교회에 성경, 은혜, 믿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영광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직’은 아니었다.

중세 교회는 예수도 있었지만, 나의 공로도 있었다. 성경도 있었지만, 전통과 교황도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존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결국 성경보다는 교회의 전통이 우위에 서고, 은혜보다는 교황의 사면이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경 위에 있었고, 은혜가 아닌 교황의 권위가 우선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곳에 ‘오직’을 추가함으로, 중세가톨릭 교회 안에 뒤섞인 불순물들을 제거했다. 그 어떤 가르침도 성경보다 못했고, 그 어떤 권위도 성경보다 높지 않았다.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했다.

오직 성경은 오직 은혜로, 오직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은 다시 오직 그리스도로 이끌었고, 결국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교리는 ‘신학적 논쟁을 야기하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18쪽)’이다. ‘오직 교리’들은 성경의 혁명적 관점이다.

마르틴 루터
왜 ‘오직 성경’이어야 하는가?


가장 먼저 다루는 주제는 성경이다. 조직신학에 있어서도 신론보다 앞선 것이 바로 계시론, 즉 성경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그 어떤 신학도 설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핵심 원리는 오직 교리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교리(23쪽)’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으므로 구원을 얻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

누구나 아는 이 지식은 종교개혁 이후가 돼서야 일반인들에게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중세 교회는 사제가 아닌 이상 함부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해석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들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해석된 성경의 의미들을 듣고 받았을 뿐이다.

인간의 해석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며, 특히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면 왜곡을 넘어 오도한다. 바로 이러한 위험성을 간파한 루터는 ‘오직 성경’이 모든 권위의 최종 권위이며, 절대 권위임을 선언했다.

“교회를 가르치는 것은 전통도, 교황도, 공의회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성경에 종속되며, 성경에 의해 지배된다. 전통이나 교황, 공의회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들을 규정한다(24쪽)”.

‘성경으로’가 아닌 ‘오직 성경으로’가 되자, 중세교회는 기우뚱거렸다. 그리고 곧 무게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중세 교회는 온갖 좋은 교리와 성경 지식을 교회와 전통 안에 담고 있었다. 그러나 사제와 공의회, 또는 교황의 발 아래 둠으로써 아무도 열어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에 루터는 성경을 사제보다, 공의회보다, 교황보다 더 높은 곳에 올려놓았다. 그곳이 원래 성경이 있었던 자리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 안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뿐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고 가르친다. 즉 삶에 대한 진정한 가르침 또한 성경인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 교리는 예리했다. 전통에 기댄 에크는 얀 후스와 루터를 엮어 이단으로 몰아갔다. 루터는 ‘오직 성경’에 근거해 에크를 공격했다.

루터는 에크를 향해,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교황이 없고 공의회가 없다면, 어떤 권위에 의존할 것인가 물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내세우는 권위의 모호함과 허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 앞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엎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뒷걸음쳐 갔고, 퇴보했다. 에크가 대변했던 중세 교회도 그렇게 거짓된 전통과 교황의 권위 아래로 스스로 함몰되었다.

나가면서

이 책은 쉽고 간결하다. 개신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쉽고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희미하던 다섯 ‘솔라’에 대한 이해가 한결 가깝게 다가온다.

타락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종교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헛된 전통과 타락한 권위에 종속되어 거짓을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

‘오직 성경’의 구호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의 탐욕이 짓밟은 하나님의 말씀을 되찾으려는 욕구의 발현이었다. 복음 설교를 듣는 듯한 저자들의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교리의 의미를 밝히고,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적용을 위한 교훈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모든 성도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소그룹을 통해 읽고 나누어도 좋고,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전달하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양구장로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