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승자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교회도 예수님 믿고 승승장구 하면서 잘나가는 사람에게 환호합니다. 간증 듣기를 원하고, 그 삶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을 보기 위해 모여 듭니다. 성공한 거기에 하나님이 일하신 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고 망하고 병들고 고난당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실까요?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 사람들은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성공의 샘플로 삼고 그의 성공기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녀가 요셉처럼 훌륭하게 되어 크게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지요, 그런데 요셉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는 히브리 출신의 소년 노예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요셉의 인생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요셉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창 15:13).

하나님은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요셉을 먼저 애굽 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비전을 요셉은 미리 알았습니다(창 37: 6~9).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요셉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에 크게 쓰임 받기 위해 애굽에 들어갈 때 적어도 명문대 유학생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가족에게 버림받은 큰 상처를 안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들어 갔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그 귀한 청년의 때를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하면서 그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노예로 팔렸으니 죽도록 일하면서 낭비해 버린 아까운 시간들 아니었겠습니까? 전도유망한 청년이 저러다 인생 망가지는 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시는 방법은 사람의 생각으로 다 추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소망입니다. 요셉이 가족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하게 노예로 뺏겨버린 시간들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때가 이르러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자신의 소명을 감당할 때 비로소 다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상처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 드리면서 그 상처는 새롭게 해석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창 50:20)

상처가 소명이 되었습니다. 영광의 상처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니 용서 못할 것도 쓴 뿌리로 남을 것도 없습니다. 요셉이 살았던 노예의 시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지나고 보면, 노예로 팔린 요셉은 주의 일을 위해 희생 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요셉에게 절대 부당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노예의 자리에서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창 39:2~5). 때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총리대신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들어왔습니다(창 26:8~27).

그들 70명이 애굽 으로 입성하는 장면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웅장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 졌습니다.  누가 이일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프로젝트의 한 막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계획과 총괄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무능한 가족 구성원 들이 부대끼면서 만드는 갈등과 아픔도, 그 가족의 배신으로 인한 잔인한 상처도, 가족의 희생양이 되어 노예로 팔려간 소년의 끔찍한 과거조차도, 주님의 프로젝트 안으로 들어오면 다 쓰임 받게 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히브리 노예 소년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이영은 목사(서울 마라나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