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 신앙을 도덕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모든 판단 기준은 오직 도덕성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왜곡된 중세의 기독교는 어쩌면 다 그런 부류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들이 보기엔 종교의 본질(?)인 ‘도덕’ 문제, 예컨대 ‘인간의 죄를 책망하고 의와 선을 장려하는 일’엔 도외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한 루터가 당연히 잘못된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그에게 ‘도덕폐기론자(antinomianism)’라는 누명을 씌운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주지하듯, 의(義)에 대해 루터보다 강조한 이가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은 죄와 불의를 미워하시며, 의가 없는 죄인에게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 7:11)’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피나는 노력에도 의(義)에 이르지 못한 데서 오는 죄의식과 그로 인해 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심은 그를 거의 실성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후에 그의 종교개혁 근간이 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나니(롬 1:17)”라는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한때 그에게 지독한 증오의 대상이 됐던 것도, 그런 경험에서 나온 반작용이다.

물론 후에 그는 이 ‘하나님의 의(義)’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선물로 주어지는 의’임을 깨달았다.

이렇듯 루터를 비롯해 개혁자들이 ‘믿음의 의’를 강조한 것은 상아탑에서 만들어 낸 사변적(思辨的) 교리가 아닌,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는 치열한 사투(死鬪)와 좌절을 통해 몸소 체득한 진리이다.

전적 부패한 인간은 오직 ‘믿음의 의(義)’만이 드높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성령의 가르침과 의에 대한 진정한 숭상의 결과였다.

예수님은 동시대인들 중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졌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외식자(마 15:7)’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고 꾸짖은 일이나, 성전에서 기도하던 세리에게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고 해 주신 것에서(눅 18:14) 그가 동시대인들과는 다른 ‘의’ 개념을 가졌음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곧 ‘믿음의 의’이며, 그것만을 그가 ‘하나님의 의(요 3:18)’로 인정하셨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신 것도 그 ‘믿음의 의(요 16:8)’였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의를 중시한다고 하면서 ‘믿음의 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사실 ‘의’를 중시한다는 그들의 말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이는 ‘믿음의 의’만이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의(義, 롬 3:21-22)’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의’를 부정하면서 의를 숭상하다는 말은 언어모순이다.

사도 바울도 ‘믿음의 의’에 복종하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자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이 말씀은 그것이 단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유대인들의 무지만을 지적한 것이 아닌,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적 의’를 ‘전가의 보도(傳家之寶刀)’처럼 여겨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불복했다는 뜻이다.

만약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의’를 숭모했다면 자신들의 ‘행위적 의’를 부정하고 ‘믿음의 의’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행위적 의’와 ‘믿음의 의’는 서로 병립할 수 없는 대척점에 서 있다. 그리고 ‘믿음의 의’가 부정될 때 당연히 그것의 기반인 그리스도의 피도 부정된다.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

다윗이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3)”라고 한 것은, 전적 부패한 인간에게 죄는 불가항력적인 것임을 말한 것이다(이는 신자가 죄에게 종노릇한다거나 죄에서 해방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롬 6:6, 18, 22).

이런 다윗의 태도는 죄에 대한 무기력을 한탄한 사도 바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8-25)”.

다윗, 베드로 같은 믿음의 위인들의 실족은 그 적나라한 예이다. 물론 이들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흠결은 피했다고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 거기서 거기다.

앞서 언급했듯, 율법에 흠결이 없는 완벽한 자들이라며 당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바리새인의 의(義)를 위선(僞善)이라고 폄하한 예수님의 평가도 같은 맥락이며, 외모만 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결정적일 수 없다는 반증이다.

회칠한 무덤같이 번지러한 그들의 포장된 ‘의(義)’ 속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다(마 23:37-38). ‘천한 자가 귀한 자나 인간의 거짓됨은 저울에 달면 하나도 차이가 없다(시 62:9)’ 말씀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도 단지 행위적인 살인, 간음을 피하는 것만이 아닌 마음의 미움, 음욕까지 피할 때 비로소 그 죄들을 피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더 노력하면 마음의 죄까지도 피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말씀한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데, 왜 나는 자주 크고 작은 죄들을 범하고 그로 인해 좌절감을 맛보아야 하는가’는 기독교의 역사 이래로 기독교인들에게 쉼 없이 던져진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항상 양 극단의 반응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죄는 피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아예 싸우려는 시도도 안하고 막 나가든지, 아니면 한 동안 죄와 사투를 벌이다가 그것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는 자포자기하든지이다.

혹은 죄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죄를 즐기자는 소위 에피큐리언적(epicurean)적 태도를 취하든지, 아니면 어떡하든지 죄를 피하려고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이다. 금욕주의(asceticism, 禁欲主義), 신비주의(mysticism, 神秘主義), 수도원주의(Monasticism) 운동들이 그런 노력의 결과물들이다.

또는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이 아닌 초자연적인 성령의 힘을 빌어 단번에 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들도 나타났다. ‘웨슬리안 완전주의(Wesleyan Perfectionism)’‘재중생(reregeneration, 再重生)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소위 불(火)만 받으면 하나님께 저절로 복종하게 되고, 연약함이나 죄지을 생각도 다 사라지면서 일시에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어차피 죄를 벗어날 수 없다면, 죄의식에서라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구원받은 자들은 죄를 지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소위 구원파적 가르침도 나타났다. 이들 모두는 자기 나름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나 대개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이다.

역사상 ‘죄와 의’에 대한 가장 완전한 개념이 개혁자들의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개념이다. 그야말로 성령의 인도를 받은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믿음의 의’가 완전한 ‘하나님의 의’이지만 그것은 전혀 자기의 의와 무관한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이며,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인한 법적인 선언이지 속속들이 의롭고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로 살리고 ‘칭의’도 살리는 ‘신의 한 수’이며, ‘의인이면서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는 루터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인간관에 기반한다.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왜 죄를 범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는 동시에, ‘완전주의(Perfectionism)’ ‘구원파’ ‘계몽주의’ ‘이신행칭의’ 같은 왜곡된 죄관(罪觀)들에서 건져준다.

죄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믿음의 의’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한다. 동시에 죄보다 크신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므로 죄책을 뛰어넘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한다.

죄가 있음에도 그 죄와 씨름하기보다는 그 죄를 정복한 그리스도의 승리적 의(義)를 주목하므로 안심을 얻는다. ‘죄’보다 ‘하나님의 의’를 자주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죄를 주목하고 죄와 씨름한다고 그리스도가 갖다 준 ‘의의 승리’와 ‘영광’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넘어짐은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의 발로이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넘어짐을 통해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하고 그를 떠날 수 없는 존재임을 각인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정할 수 있다.

완전주의자들이 기대하듯, ‘죄없이 완전히 서는 것?’ 아니다. 인간은 절대 완전해 질 수 없다. 완전해질 수 있다고 하는 자가 있는가? 그는 자신을 철저히 위장한 위선자이든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면서 그런 줄 착각한 것일 뿐이다. 아니라면 그는 마귀이다.

그의 초인적인 능력으로 실패 없이 자신을 세우고 난 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여 그리스도를 필요치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여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함’ 대신 ‘넘어짐’을 허락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롬 14:4). 이것을 알 때, 우리의 약함은 좌절의 빌미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대지가 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