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일본은 총칼의 폭압만으로는 3·1운동으로 분출한 우리 민족의 저항을 막을 수 없었으므로 겉으로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조금 완화하여 유화정책을 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작이라고나 할까.

문화생활이나 교육 등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총독부는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를 융화하여 서로 가깝게 지내자는 의미로 내선융화(內鮮融和; 일본과 조선의 화합), 선만일여(鮮滿一如; 조선과 만주가 하나와 같음), 일시동인(一視同仁; 일본과 조선을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 등의 조금은 부드러운 강령을 내세웠다.

또한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일민족이라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주장하고,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웠다.

그들은 일본민족과 한민족은 시조신인 천조대신의 적자와 서자로서 한 조상을 가진 같은 민족이라고 날조했다. 그리하여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총독부는 전국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매일 정오에 참배토록 했으며 거기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낭독하고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라고 강요했다.

나아가 모든 가정집에는 카미타나(神棚)라고 하는 신이 들어 있다는 상자를 만들어 모시고 거기에 수시로 경배하도록 시켰다. 이런 모든 요상한 짓거리는 조선인의 혼을 말살하고 일본인의 노예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엔 이른바 창씨개명이라 하여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만들어 등록하도록 강요했다. 만일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취학이나 취직을 못 하도록 막고, 우편물 이용 등 일상생활을 방해하거나 경찰서로 끌고 가 심한 고문을 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숨을 쉬기조차 힘에 겨운 세월이었다.

총독부는 마침내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그것은 충성스런 일본 식민지의 신민을 양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를 보급시켜서 잘 부려먹기 위한 보통학교와 농업, 상업, 공업 분야의 하급 직업인을 만들기 위한 실업학교,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학교만 허가하고 차원 높은 지식을 탐구하는 대학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한민족의 지식욕을 충족시킬 만한 대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므로 민립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큰 뜻에 따라 설립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창가에 서 있는 남궁억의 눈엔 운동장에서 뛰노는 학생들의 모습이 가득 찼다.

“아, 어찌 우리 민족은 아름다운 강산을 빼앗기고, 죄 없는 어린아이들마저 식민지 백성이 되어야 하는가.”

그는 탄식하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주여, 이 몸은 환갑이 넘은 기물(棄物 ; 쓸데없어 버릴 물건)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받으시고, 젊어서 가졌던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하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신으로 영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기도의 주제는 유리봉에서도 언제나 그랬듯 오로지 우리 민족의 독립이었다.

그날 남궁억은 하나의 큰 결심을 했다. 마음 속에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온 나라에 무궁화를 심어 이 땅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모든 백성이 하나로 굳게 뭉쳐야만 한다. 뛰어난 지도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2천만 민중이 함께 기어이 독립을 하겠다는 자각과 실천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려면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구심점이 있어야겠다.”

그리하여 무궁화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일컬어 무궁화의 나라라고 했으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오면서 무궁화는 한민족 백성들이 끊임없이 사랑한 꽃이었다.

그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는 무궁화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기가 어려운 시대였다. 잘못 걸렸다가는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 백성들은 무궁화를 무궁화라고 제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근화(槿花)라고 했다.

봄이 오자 남궁억은 모곡학교가 자리잡은 강신재 언덕 위에 넓은 터를 잡아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다. 학생들도 나와서 도왔다. 무궁화나무만 심으면 일본인 관리들이 의심할까 봐 무궁화 묘목과 비슷한 뽕나무 묘목을 군데군데 함께 심어 길렀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궁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무궁화는 ‘피고 또 피어 영원히 지지 않는 꽃’ 또는 ‘영원무궁토록 빛나 겨레의 환한 등불이 될 꽃’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무궁화라는 이름은 지금은 한자로 쓰지만 원래는 순우리말이었답니다.

무궁화의 학명은 히비스커스로서 이 그리스어에는 ‘아름다운 여신을 닮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어요. 영어로는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인데, ‘선택받은 땅에서 피어나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꽃’이란 의미랍니다.

이제 7월이 오면 무궁화는 활짝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10월까지 1백 일 동안 한 그루에 2-3천여 송이의 꽃을 계속 피우지요. 무궁화는 빛을 좋아해 아침에 피었다가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 스스로 꽃잎을 닫고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또 다른 꽃송이가 끊임없이 피어난답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보는 무궁화는 어제의 그 꽃이 아닙니다. 우리가 꽃잎이 말라 시든 무궁화를 볼 수 없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무궁화는 다른 어떤 꽃보다 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우아한 기품과 소담스러움이 진정 아름답습니다.

제철이 오면 무궁화는 연분홍, 진분홍, 흰색, 보랏빛을 띤 분홍,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는 꽃 등을 환하게 피워 우리 보리울은 별천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한반도까지도….”

무궁화 묘목은 마음 속의 희망처럼 파란 싹을 틔웠다. 남궁억은 실업 시간이면 학생들을 무궁화 묘포로 불러내어 김을 매고 거름을 주도록 했다. 함께 잡초를 뽑던 남궁억이 무심결에 “일본놈처럼 질기군 그래.”라고 말하자 학생들은 더욱 부지런히 잡초를 뽑아냈다.

어린 무궁화 묘목에 들러붙어 진액을 빨아먹는 해충을 잡아내던 남궁억 선생이 허리를 펴고 말했다.

“벌레는 악독한 일본놈 같기만 하지만 또한 우리 민족의 내부에도 들어 있습니다. 친일 모리배와 매국노들은 우리 민족의 피를 빨고 살을 갉아먹는 해충보다 나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무관심도 큰 문제입니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성하여 무궁화처럼 활짝 피어날 때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게으름, 의타심,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욕심은 나를 갉아먹는 해충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