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 연애는 다큐다 76 그네 이별 부재 외로움 기억 사랑 과거 추억 숲 상처

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원장 김도인 목사에 이어,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의 설교도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본문: 창세기 37장 18-28절

모든 사람에게 상처는 있다

이석희 시인인 쓴 ‘누가 그랬다’는 시중에 일부분입니다.

“누가 그랬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고….
가끔은, 이성과 냉정 사이에서 감정이 폭발할 것 같아 가슴 조일 때도 있고….
감추어 둔 감정이 하찮은 갈등에 터져 나오려 가쁜 숨을 쉬기도 한다.
누가 그랬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그저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안아주는 거다.“

이 세상에서 상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상처가 크고 작을 뿐입니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을 뿐 인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냥 던진 말 한마디가 행동하나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왜 상처를 주느냐고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상처가 제일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상처만 볼 때가 많습니다.
김은주가 쓴 ‘1cm’ 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단체사진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한 독사진이다. 누구나 가장 먼저 찾아보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참 공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제일 관심이 많습니다. 자신의 상처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상처는 다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상처가 있고 앞으로도 상처를 받고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상처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상처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상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곪아 들어가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울고만 있으면 있던 힘마저 빼앗기게 되지만, 상처에 약을 바르고 끊임없이 돌보게 되면 오히려 그 상처가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 덕분에

그래서 우리는 ‘때문에’의 삶이 아니라 ‘덕분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건강을 좌우하는 게 음식이라면, 정신적 건강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부정을 긍정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문에’라는 말보다 ‘덕분에’라는 말로 바꿔서 마음을 먹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세상은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현상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는 부정의 언어이지만 ‘덕분에’는 긍정의 언어입니다. 언제나 부정의 언어보다 긍정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상처 ‘ 때문에’ 아픈 삶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일한 상처이지만 상처 ‘ 때문에’ 아픈 사람이 있고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 때문에 아픈 사람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의 형들의 상처

오늘 말씀에 보면 요셉의 상처와 요셉의 형들의 상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양을 치고 있는 아들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먹을 것을 전해주기 위해 요셉을 세겜으로 보냅니다.

요셉이 출발한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80km 정도 됩니다. 그 당시 걸어서 이틀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헤브론에서 출발하여 세겜에 도착했을 때 형들은 그 곳에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요셉이 형들을 찾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요셉의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거리는 30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요셉은 먼 길을 온 것이 힘이 들었지만 형들도 보고 싶고 안부를 알아야 하기에 열심히 도단을 향해 갔습니다. 그러나 도단에서 요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형들의 반가움이 아니라 죽음의 위험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합니까? 요셉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먼 거리를 자신들의 안부를 묻고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 위해 온 동생을 반갑게 맞아주기는커녕,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요셉을 보면서 처음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요셉이 오는 구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창 37:1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져 버리면,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 지 한 번 보자고 말합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형들은 요셉의 꿈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상처가 형들의 마음 가운데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둘째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요셉도 철이 없는 것이 이런 꿈을 꾸었으면 가만히 잠자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그 꿈 이야기를 그대로 했습니다. 제가 요셉의 형이라도 기분이 나빴을 것 같습니다. 형들도 요셉의 꿈을 듣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요셉이 미웠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고 있으니, 몇 대 때려줄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맏형인 르우벤은 맏형답게 요셉을 구해내고자, 요셉을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제안합니다. 르우벤은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을 구해주려고 생각했습니다. 맏형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다른 동생들도 일단 그 의견에 따르기로 합니다. 형들은 요셉이 오자마자 붙잡아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그냥 구덩이 속에 던져 넣은 것이 아닙니다. 형들은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넣었습니다. 왜 채색옷을 벗겼을 까요? 그것은 채색옷에 대한 형들의 상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노년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 처음 얻은 아들인 요셉을 끔찍하게 사랑했습니다. 편애를 했습니다. 그 표시로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당시 채색옷이란 왕이나 족장의 후계자가 입었던 옷으로 장자 권을 상징하는 옷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 채색옷은 형들에게 있어서 상처였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채색옷부터 요셉에게서 벗기고 있습니다.

요셉의 상처

요셉의 형들은 구덩이에 요셉을 빠트려 놓고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요셉이 가지고 온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은 요셉을 향해 ‘꼴 좋다. 꿈꾸는 자의 결말이 저렇구나’ 하면서 동생을 비아냥 거렸습니다.

요셉은 그 구덩이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가만히 있었을 까요?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구덩이에서 올라오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어쩌면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구덩이에서 빠져나려고 기어오르고 기어오르다가 떨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형들은 이런 요셉을 외면했습니다. 형들이 그때의 상황을 자신의 입으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구덩이에 갇혀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요셉이 자신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비아냥거리는 형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결국 유다의 말로 인해 요셉은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개에 팔려가게 됩니다.

원래 당시 노예 한사람의 값은 은30세겔이였다고 합니다. 곧 요셉은 노예 한 사람 값도 못한, 은 20세겔이라는 헐값을 받고 형들이 팔아넘긴 것입니다.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요셉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이 마음을 잘 모를 것입니다.

형들에게는 요셉에 대한 상처가 있었고, 요셉은 형들에 대한 아픈 상처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형들은 상처 때문에 아파해서 요셉을 죽이려고 했지만, 요셉은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요셉은 자신을 애굽 땅으로 보내신 분이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셉은 그 아픈 상처가 하나님의 섭리가 가운데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고 오히려 앞서 행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이유

그런데 왜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입니까? 왜 상처 덕분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천영희 시인은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이라고 했습니다. 상처를 알고 슬픔을 삭인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앓고 난 뒤의 ‘사람다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석희 시인이 말한 것처럼, 풀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 오는 날에는 눈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비가 그치면 햇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상처 많은 햇살이 더 맑고, 상처 많은 꽃잎이 더 향기롭습니다. 소나무가 송진의 향을 내뿜으려면 몸에 상처가 나야 합니다.

곧 나의 상처가 나의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상처의 고통을 견뎌내는 적극적인 인내의 힘이 진주와 같은 아름다움을 낳는 것입니다.

영롱한 진주도 처음에는 하나의 상처였습니다. 조개는 상처를 내는 침입자 모래알을 어떻게 밖으로 내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직 방법이 있다면 자신의 체액으로 그 모래알을 두텁게 감싸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정성을 다해 상처를 보듬고 감싸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상처로부터 배운 사람, 아픔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성숙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상처로부터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픔으로 딛고 오히려 자신을 가꾸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형들을 살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

그러면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내 스스로 치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대구 출신의 정호승 씨라는 시인이 계십니다. 이 분은 자신의 상처를 ‘내가 낳은 아들’이라고 생각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상처가 내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어머니가 되고자 노력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 돌봅니다. 젖을 먹이고 목욕도 시키고 아프면 간호를 합니다.

저희 막내딸이 예전에 구내염으로 아파서 일주일 동안 유치원을 가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울고 열도 나고 잘 먹지도 않고 완전히 한두 살 먹은 애가 돼버렸습니다. 밤에는 더 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피곤해서 그냥 자는데 저희 아내는 자다가도 애가 열이 올라 우니까 물가지고 와서 물을 먹이고 몸을 물로 닦아주라고 합니다. 안아주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바로 자녀를 이렇게 돌봅니다. 상처가 내 자녀라면 이렇게 자녀를 돌보듯 돌봐야 합니다. 만일 엄마가 아기를 돌보지 않으면 그 아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돌보지 않으면 상처로 인해 더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상처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는 내가 돌아보아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처를 받는 것은 궁극적인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상대를 상처 주어도 상처를 받지 않으면 되는데, 내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상처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상처는 내가 돌보아야 합니다. 상처에 치유의 물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다 외상을 입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야 합니다. 약을 한 번 바르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발라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딱지가 생깁니다.

딱지가 생기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자꾸만 떼 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 딱지를 떼 내면 어떻게 됩니까? 또 그 상처가 덧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상처가 다 아물어서 딱지가 저절로 떼어질 때까지 두면 깨끗하게 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상처도 이런 돌봄이 필요합니다. 상처는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돌보듯 잘 돌볼 때, 상처는 치유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에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 30:2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의 상처를 싸매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상처를 치유하시고 더 아름다운 삶으로 더 빛나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세월호 침몰 참사는 모든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특별히 유가족들은 어떤 위로도 힘이 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구조는 받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가 있습니다. 친구들은 죽었고 자신만 살았다는 생각에 그들이 가지는 상처 또한 너무나 큰 상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들이 당한 상처가 어떻게 당장 치유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들이 상처 때문에 더 아픈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언론에 실린 글을 보고 가슴이 참 먹먹했습니다. 이 글은 세월호 사건으로 실종된 김정민 학생의 아버지인 안산동부교회 김영삼 장로님이 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란 기도문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회개하고 나온 것처럼 돌아와도 감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정민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이번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생사화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항상 고백하옵소서.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잠시 있다 가는 나그네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말씀과 기도의 현장가운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복음으로, 오직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자식을 생각하면, 물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자식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그 상처를 하나님께서 싸매어 주시니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상처가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가 없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그들과 함께 3년 동안을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뽑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는 바로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예수님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룟 유다라는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어디 유다뿐입니까?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믿었던 제자한테서 철저하게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상처 중에서 가장 큰 상처는 배반당한 상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었기에 분명 아픔과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분노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을 때,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 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았든 눈빛은 긍휼의 눈빛이었습니다. 괜찮다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실수를 통해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더 귀한 제자로 쓰임 받으실 것을 기대하는 눈빛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그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기대하시며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 상처 덕분에 정말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눈빛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워 지기를 원하십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우리는 자신만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치유받은 사람들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의 마음을, 자식을 잃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구 지하철 사건으로 인해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식을 잃어버렸지만 그 상처가 치유된 사람들이라면, 동일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게도 상처가 있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상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상처 때문에 많이 힘들고 아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처를 내 자녀를 돌보듯 잘 돌보아야 합니다. 내 상처를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 또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는 “설교를 만들어내기 힘들어 자괴감도 들고 목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김도인 목사를 대신해 목회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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