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는 “설교를 만들어내기 힘들어 자괴감도 들고 목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김도인 목사를 대신해 목회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원장 김도인 목사에 이어,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의 설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본문: 사도행전 5장 33-42절

인생지사 새옹지마(人間之事 塞翁之馬)

‘인생지사 새옹지마(人間之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중국 북쪽 변방에 미래를 예견한다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이 키우던 한 마리의 말이 도망치게 됩니다. 동네사람들은 노인을 위로합니다. 하지만 노인은 이 일이 언제 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며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정말 노인의 말대로 집을 나갔던 말은 다른 좋은 말 한 마리를 데리고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은 잘됐다며 축하를 해주지만 좋은 일이 화가 될지도 모른다며 노인은 또 다시 무덤덤한 태도를 보입니다.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말 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은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게 됩니다. 이웃들은 아들의 일로 노인을 위로를 하지만, 노인은 ‘이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어찌 알겠소?’ 하면서 일관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며 마을의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들은 열에 아홉이 죽었는데,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친 까닭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서 무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좋은 일이 있다고 마냥 기쁨에 들떠 있어도 안 되고, 나쁜 일만 겹친다고 인생을 비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새옹지마’입니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숫자를 헤아릴 때는 1 다음은 2이고, 2 다음은 3이고 3 다음은 4, 5, 6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이런 식으로 언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반대로 일어날 때도 많습니다. 순조롭게 모든 일이 진행이 되는 가하면 그렇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생각지 못한 일과 사건들을 맞닥뜨리면서, 당황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각지 못한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더할 나이 없이 좋습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어려운 사건을 만날 때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어려운 사건으로 인해서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건은 해석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생각지 못한 사건을 만난다면,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입니다. 사람은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그 일을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시각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하지만 사건을 가장 사실에 가깝게 이해하려 하더라도, 각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해석하는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반조각 남은 빵이나 절반만 남은 음료수를 보고 사람들의 반응은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네” 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반 밖에 안 남았어?”하고 짜증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셋 중에 어느 쪽에 해당되십니까? 우리가 이왕이면 첫 번째 반응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행복하다고, 누군가는 불행하다고 받아들인다면,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현명한 것입니다.

신발 회사에서 아프리카로 두 명의 세일즈맨을 보내 시장 조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한 명은 가서 이런 결과를 알려 왔습니다. “아프리카에 와서 보니 신발을 신은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신발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신발을 팔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렇게 알려 왔습니다. “아프리카에 와서 보니 신발을 신은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신발이 한 켤레도 없기에, 신발을 팔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발을 신지 않은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누가 앞서가는 사람이 될까요? 가능성을 본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입니다.

2015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종교인 통계를 보 대한민국의 복음화율이 19.72%로 나와 있습니다. 5명 중에 1명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지역별로는 전라북도가 26.94%로 1위를 차지했고, 2위가 서울로 24.2% 입니다.

저희 교회가 있는 대구는 복음화율이 12%로 나왔습니다. 꼴찌는 아니지만 밑에서 몇 번째입니다. 대구 땅의 복음화율은 전국 평균도 되지 않습니다. 대구 시민 중에 거의 90%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고 어떤 사람들은 대구는 가망이 없는 땅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90%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만큼 전도할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니까, 더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통계 수치를 보고도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모든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훔볼트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그 일어난 일 못지않게 우리들의 행복과 관계가 있다.”

이 분의 이야기도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인생 가운데 일어난 일을 어떻게 내가 받아들이느냐 ,해석하느냐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생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우리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어려운 사건들뿐 아니라, 모든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긍정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잡혀간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이후에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종교 지도자들은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고 이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둡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옥에 갇힌 사도들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이들을 이끌어 내십니다. 사도들은 주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 나와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종교지도자들은 다시 사람들은 보내서 사도들을 잡아 공회 앞에서 세웁니다. 이들은 지금 무척화가 나 있습니다. 천사가 감옥에서 구해주었지만 공회원들이 보았을 때는 탈옥을 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사도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향해 어떻게 감옥에서 빠져나가게 되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을 아는 것이 두려웠는지 이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습니다. 단지 지난번과 같이 예수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것을 계속하고 있느냐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사도들은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렸고 이 일에 자신들이 증인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줍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공회원들은 너무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사도들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의 해석

그때 바리새인요 율법교사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잠시 나가게 하고 말을 합니다. 그는 유대의 교법사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에게 주는 ‘라반’이라는 칭호를 받은 7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고, 그의 인품 또한 훌륭해서 산헤드린 공의회 분위기도 그의 말 한 마디로 바꿀 수 있는 정도의 대단한 위인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원들에게 사도들의 처리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전에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했던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그들이 비록 백성들을 꾀어서 일어났지만 결국 그들이 죽고 나니 사람들이 다 흩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에게 났으면 자연스럽게 드다와 유다처럼 무너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우리가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니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을 합니다.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공회원들은 다 좋게 여기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라고 경고하고는 놓아줍니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다른 공회원들과 가말리엘의 해석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말리엘이 이렇게 다르게 해석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사도들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건자체 보다 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뇌는 단순하다

우리의 뇌는 복잡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면도 있다고 뇌과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대로 상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지금 아주 상큼한 레몬을 입에 넣는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벌써 입 안에 침이 고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레몬을 먹은 것이 아니라 상상한 것뿐인데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뇌가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입니다.

뇌가 이렇게 단순합니다. 뇌는 진짜 기쁜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가짜로 웃어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엔돌핀을 비롯한 좋은 분비물을 분비해서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뇌는 단순해서, 어떤 사건에 대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에 대해 더 집중하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곧 그 사건 자체를 기억하기보다,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양 이면 좋은 방향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특히 나를 힘들게 한 사건일수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을 하면 뇌가 그것을 기억해서 우리는 그 사건을 떠 올릴 때마다 힘들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비록 나를 힘들게 한 사건이라 해도, 그것을 나의 삶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면 그 사건을 떠올려도 우리는 힘들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라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너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입니다.

미국 지하철역에서 시각장애인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 앞에는 종이 한 장 놓여 있었고,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사람들은 구걸하는 시각장애인과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문구가 있는 종이를 보고서도, 별다른 표정 없이 스쳐가거나 어쩌다 한 명이 동전을 던져주고 갔습니다.

그 때 한 여자가 다가와서 종이를 뒤집더니, 다른 글을 써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그 글을 본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게 시작장애인 앞에서 동전을 놓고 갔습니다. 궁금해진 시각장애인은 누군가에게 종이에 어떤 말이 쓰여 있는 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여자가 써놓고 간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볼 수가 없네요” 같은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구걸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볼 수 없네요” 라는 문구는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글귀는 그를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는 가엾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는 그를 진심으로 돕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같은 사람, 같은 상황, 같은 사물일지라도 바라보는 관점이 바꾸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해석을 달리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결과까지 달라집니다.

사도들의 해석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그것을 기쁘게 여기고 계속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1-42)”.

사도들은 예수를 전하는 것으로 인해 잡혀가서 채찍에 맞았고 죽을 위기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풀려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그렇게 하면 죽여 버릴 것이라고 경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충분히 이 일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정말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하겠다. 한 번 더 예수님을 전하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사도들이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더 전하라고 또 우리를 살려주시고 석방시켜주셨구나 그렇다면 더 복음을 전해야지.”

사도들은 자신이 풀려난 사건에 대해 믿음의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인이기에 나의 입장, 인간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해석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종으로 가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종으로 파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비록 배다른 형제라고 할지라도 이런 형들을 용서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장군의 가정 총무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강간 미수범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애굽의 총리에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곡식을 사러온 형들과 만나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 앞에서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시는 순간, 형들은 요셉을 만났다는 반가움은 뒤로하고,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겁먹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5)”.

요셉은 지금 자신이 애굽의 종으로 팔려온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형들이 자기를 시기해서 판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입장인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사건을 바라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여기서 모든 것이란 기쁜 일, 행복한 일, 좋은 일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픈 일, 불행한 일, 나쁜 일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결국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사건을 만나도 고통가운데 있을 지라도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의 해석을 하면서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예수님이 한 번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가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 때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허비한다고 분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잘못 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0-13)”.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영적으로 깊게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라는 놀라운 해석이었습니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사건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예상했던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 사건을 접할 때 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우리는 좋은 쪽으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사건 가운데서 감사의 제목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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