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분량 <예수쟁이 정진경> 공개
전 MBC 국장 박흥영 장로 제작 맡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 목회 사역까지

정진경 다큐멘터리
▲故 아천 정진경 목사.
신촌성결교회(담임 박노훈 목사)에서 故 정진경 목사 10주기를 맞아 <예수쟁이 정진경>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를 추모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첫 부임지인 공주성결교회와 유학했던 미국 아주사퍼시픽 대학 등을 찾아가 정진경 목사의 일생을 돌아보고, 그의 정신을 기리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3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지난 2일 故 정진경 목사 10주기 추모예배에서 공개됐다. 다큐멘터리는 박노훈 목사가 기획했고, 전 MBC 국장 박흥영 장로가 구성, 연출 등 제작을 맡았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정진경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가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정 목사는 “집안에서 반대했지만 교회학교에 나가고, 무슨 행사가 있으면 가고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발각돼서 핍박도 많이 받고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정진경 다큐멘터리
▲젊은 시절의 정진경 목사.
그의 아버지는 “11대 종손이 예수쟁이가 되면 조상님 제사는 누가 지내냐”며 “예수쟁이 되려면 이 집에서 썩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성경책을 아궁이에 던져버리기까지 한 아버지의 불 같은 반대도, 예수쟁이를 흠모했던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정진경은 고등학교 졸업 후 뜻하지 않은 고난을 겪는다. 폐결핵에 걸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 제 병을 고쳐주시면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 하면서 사명에 대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로 헌신을 약속하자 청년 정진경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고, 구원의 소망까지 생겨났다.

결국 청년 정진경은 ‘예수쟁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진정한 예수쟁이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 신의주를 떠나 서울로 내려왔다.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 이명직 교장은 건강을 회복한 정진경 목사의 입학을 이듬해인 받아줬고, 그는 1947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청년 정진경 전도사는 26세의 나이로 공주성결교회에 부임했다. 공주성결교회 윤웅림 원로장로는 그를 기억하면서 “설날에 각 가정을 다니며 세배하고 다니니, 마을 어른들이 감탄해 자신들은 안 나왔지만 자녀들에게 ‘전부 교회 가서 어른 공양하는 것을 배우라’고 했다”며 “지역 유림들이 모든 질서를 주관함을 알고 그렇게 하셨던 것”이라고 소개했다.

오혜선 권사도 “이른 새벽 기도 후 매일 아침 학생 3명을 모아 영어 성경공부를 시작했는데, 소문이 퍼져 본 교회 학생들뿐 아니라 다른 교회 학생들까지 모여 100명이 넘었다”며 “공주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그때 100여명이 모였던 것은 크고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정진경 다큐멘터리
▲신촌성결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진경 목사의 모습.
정진경 전도사는 1949년 교단 1호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전쟁 중인 1952년 피난지였던 경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쟁 후인 1956년 무일푼의 정진경은 미국 아주사퍼시픽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가난했던 유학생 정진경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업 후 설거지부터 바닥 청소, 쓰레기 치우기 등 온갖 궂은 일을 해야 했고, 방학이면 아무도 없는 학교 기숙사를 지키며 공부했다. 홀로 남은 그는 기숙사 벤치에서 찬송을 부르며 외로움을 이겨냈다.

딸의 간청으로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온 정진경 목사는 서울신대 교수로 임명돼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장충단교회 설교목사를 겸임하며 당시 흔치 않던 ‘지성적 설교’를 통해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후 정진경 목사는 1975년 신촌성결교회에 부임해 사역을 꽃피운다. 대학가 중심에 위치한 교회 특성을 살려 학생들과 어린이 목회에 힘과 열정을 쏟았고, 모든 성도들과 소통하며 민주적으로 당회와 교회를 운영했다. 빈부 귀천을 차별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성품이 권위적이지 않고 온화했으며,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데 힘썼다.

1991년 은퇴할 때도 분명한 철학을 보여줬다. 후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먼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

그의 뒤를 이어 신촌성결교회를 섬긴 이정익 원로목사는 “원로와 후임자 간의 문제는 원로의 요구사항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후임자는 전임자에 대해 초조함을 느끼게 돼 있다”며 “이 두 가지가 모두 상쇄돼야 하는데, 정진경 목사님은 그런 점에서 큰 그릇이자 지도자이셨다”고 밝혔다.

정진경 다큐멘터리
▲한경직 목사님과 교회연합 사업에 힘쓰던 정진경 목사(가운데부터).
한국교회 연합에도 힘썼다. 고향이 같았던 한경직 목사에게서 ‘참 예수쟁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존경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월드비전 이사장이 되어 구호현장을 누비기도 했다.

한국교회 100주년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양화진에 위치한 양화진선교사묘원에 교파를 초월한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교회를 세우고 이재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위임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이후 놀랄만한 성장을 이뤘는데, 이는 교회 통합의 모델로 한국교회 200년을 바라보며 세운 조치였다.

한경직 목사는 생전 정진경 목사에 대해 “신촌교회와 성결교회 하나만을 위해 일하는 분이 아니라, 전 성결교회와 여러 교파를 망라한 한국 모든 기독교회를 위해 힘쓰시던 분”이라고 전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외에도 정진경 목사의 아들 정인천 장로가 뒤늦게 아버지를 따라 신학의 길을 걸어간 이야기 등이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