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의 성령론(71)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어야 하는데, 그 주님과 동행하는 증거는 바로 우리의 영혼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성령의 인격적인 인도하심은 어떤 특별하고도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그런 방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의 영혼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활용하심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별다른 신기한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생래적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는 성령의 인격적인 인도하심에 대해 말하기를,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당신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퍼(Steven Harper)도 말하기를, "영적 발전의 목표는 우리 삶을 갈수록 더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갈수록 많이 보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중단 없는 영교(靈交)의 위치에 도달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인데, 그 까닭은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에 의해 너무나 쉽게 중심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 중심의 영성에서 삶 중심의 영성으로 옮겨갈 때 하나님 의식의 순간들 사이에 있는 간격을 좁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성령의 인격적인 인도하심을 놓치는 일은 하루 중 수없이 일어날 수 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하게 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마땅히 기도함으로 주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만한 일을 만났을 때, 복잡한 생각에 매여 기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어떤 특별한 두려움을 주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 때, 이를 순간적으로 주님께 맡겨드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거나 행동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주님이 인도하신 바로 그 어떤 일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놓치는 일은 역시 가능하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믿는 자의 양심을 통해 당신의 뜻과 인도하심을 지속적으로 나타내 주시고 계시지만, 우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이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해 낼만큼 우리의 양심이 민감하게 훈련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환난과 시련을 우리에게 허락하심을 통해서, 양심보다 더욱 큰 환난의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향하여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우리는 마침내 그 속에서 우리 안에서 계속 말씀해 오시고 깨닫게 하시려 힘쓰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여러분과 대화하길 원하신다."(Joyce Meyer)
교회의 초기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의 인격적인 인도하심의 많은 사례가 있음을 본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만 든다면 다음과 같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지시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특히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타고 가는 수레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주셨다(행 8:26,29).
성령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받고 쓰러진 사울에게 분명한 지시를 주셨다(행 9:4-6). 이 당시 사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로 인하여 매우 당황스런 지경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일 이후 계속 사울, 즉 바울의 삶속에 주권적으로 인도하심을 주셨고, 그는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 2:4)만을 따라 복음을 전했다.
성령께서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말씀을 주고받으신 후 행할 일을 일러주셨다. 당시 아나니아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 사울에 대한 나쁜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이 점에 대해 성령께 말씀드렸지만, 성령께서는 오히려 사울이 앞으로 얼마나 주의 복음을 위해 일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까지 주심으로 아나니아에게 확신 가운데 행하게 하셨다. 바로 이때가 다메섹 체험 이후 성령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때였으니, 성령께서는 역시 당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다(행 9:10-16).
성령께서는 환상 중에 고넬료에게 지시하여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고, 역시 비슷한 시간 베드로에게도 고넬료를 만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행 10:3-6). 특히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 환상의 의미를 풀어주심을 통해(행 10:19-20), 베드로가 전부터 갖고 있던 유대 민족주의적인 편견을 깨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할 깨달음을 주시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을 깨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할 때가 있다. 그런데 성령께서 초월적으로 일하시면 이 모든 일도 쉽게 해결되는 것을 우리의 사역 속에서 많이 경험하곤 한다.
옥에 갇힌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때에도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다(행 12:7-9). 이러한 일은 매우 신기한 일로 여겨지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주시고 또 우리가 그 인도하심에 따르기만 하면 당연하게 나타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주어지느냐 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그 인도하심을 잘 이해하고 따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