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한 번은 초소를 순시하다 보니 보초가 자리에 없었다. 포졸을 시켜 알아보게 했더니, 남궁억도 잘 아는 마을의 어떤 노인이었는데 집에서 자고 있다고 했다.

얼마 후 그 노인을 불렀다. 그러고는 술을 한 잔 대접하면서 남궁억은 말했다.

“위급한 시기에 보초가 자리를 비우면 어떡하오?”

“너무 피곤해서 그랬으니 용서하소서.”

“여봐라, 이분의 볼기를 세 대 쳐라!”

어리둥절한 채로 볼기를 맞은 노인에게 남궁억은 말했다.

“술은 내가 노인장에 대한 예의로서 대접한 것이고, 볼기는 임무를 소홀히 한 데 대한 벌이니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오.”

이렇게 공과 사에 분명하고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서도 이치에 어긋나는 법이 없이 공정했으므로 모두가 그를 존경했다.

전국 각지에서 동학군이 들고 일어나자 고종 황제는 남궁억을 순무사(巡撫使)로 임명해 파견했다. 그는 어명을 받들고 임지로 가면서도 서울에 계시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잠시 선향인 보리울로 가 계시라는 글월을 써서 보내었다.

얼마 후 편지를 전하러 갔던 부하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민망하지만, 마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마님께서는 ‘내가 가길 어디로 가느냐. 나만 살겠다고 도망이라도 치란 말이더냐? 가서 아들에게 전하시오. 그런 옹졸한 생각을 하는 순무사나 어서 관직을 반납하고 죽으라더라고.’라고 하시더군요.”

“그 밖에 다른 말씀은?”

“네,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광야를 달리는 말은 결코 마구간을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남아 대장부가 나랏일을 위해 장도에 올랐으면 설령 집에 불이 났다더라도 고개를 돌려서는 아니된다’라고요. 이상입니다.”

그처럼 엄격한 어머니의 말씀을 눈물을 머금고 가슴에 새긴 순무사 남궁억은 묵묵히 말 위에 올라 길을 떠났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성난 백성들을 진정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충청도에서의 활동은 참으로 위험했다. 관찰사마저 살해되는 험악한 상황이라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만 했다.

고심 끝에 남궁억은 의병대장 유인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전갈을 보낸 얼마 후 그는 홀몸으로 동학군의 군영에 들어갔다. 간단한 예를 갖추자 유인석이 자리를 권했다.

잠시 후 유인석은 얼굴에 서릿발 같은 강직함을 보이며 말했다.

“여기 온 이유가 나를 설득하는 것이라면 그냥 돌아가는 게 옳을 것이오.”

남궁억은 침착하게 말했다.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선생의 충정은 백 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은단 말이오?”

“지금 필요한 일은 우리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일본과 싸우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일본놈과 싸워야 한다는 데 반대할 생각은 조금도 없소. 하지만 지금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럴 수가 없지 않소?”

“오늘날 동학군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에 있다는 점은 저도 잘 압니다. 저 또한 의병에 참가한 백성들과 많은 얘기를 나눠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사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이리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나라가 외세에 의해 절단난다면 우리는 망국의 한을 씹으며 개돼지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은 힘을 합쳐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부터 구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나라 안의 병균을 퇴치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니, 서울로 올라가거든 탐관오리들을 엄중히 처벌하시라고 황제께 강력히 건의해 주시오.”

“나라 위한 그 충정 잘 알겠습니다. 제 힘껏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뢰겠습니다.”

서로 입장이 다르면서도 애국 충정에서는 서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악수를 굳게 나누고 막걸리 한 사발씩을 통쾌히 마셨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남궁억은 그처럼 가는 곳마다 무력 사용을 자제하고 대화로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서로 피를 보는 일이 전혀 없었다.

황궁으로 돌아간 남궁억은 그동안 보고 느낀 점을 사실대로 기록해 고종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그리하여 탐관오리들에게 둘러싸인 고종의 눈과 귀를 열어 줌으로써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게 했다.

1895년에 남궁억은 다시 궁내부로 옮겨 토목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궁궐 부근을 돌아본 후 종로와 정동 일대의 도로를 확장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그 일대는 낡은 집들이 즐비했으며 길은 비좁고 지저분해 통행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리고 외국 사신들이 많이 왕래하는 터라 나라의 첫 인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사업이라고 설득하여 일을 진행했다. 길가의 낡아빠진 집들을 적정한 가격에 매입하여 철거하고 도로를 훤하게 넓혔다. 그리고 민주국가에는 광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경운궁 앞에 넓은 광장을 만들었으니 바로 오늘날의 시청 앞 서울광장인 것이다.

그 다음엔 탑골공원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아주 심했다. 쓸데없는 국고 낭비라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똑똑한 토목국장 나리.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사방천지가 다 산인데 굳이 도심 한복판에 공원을 만들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오? 심심해서 해보려는 것이오?”

어떤 대신은 비웃기조차 했다. 그러나 남궁억은 차분히 조리 있게 대답했다.

“앞으로 서울이 크게 번창하면 사대문 밖의 산이나 녹지대는 점차 사라지리라고 봅니다. 바쁜 시민들은 성 밖의 산까지 갈 시간도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대비해서라도 서울의 중심부에 공원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합니다. 지금만 해도 그렇습니다. 공원을 만들어 놓으면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고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장소로서 사랑받게 될 것입니다.”

조정 대신들은 그의 논리적인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결국 남궁억은 탁지부에서 공원 조성 비용을 얻어내었다. 그 다음날부터 남궁억은 도심에 버려져 있던 원각사 터에 나가 직접 지시하며 넓고 푸른 탑골공원을 만들어 나갔다.

만약 그가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눈앞의 일만 좇는 사람이었다면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런 큰일을 벌이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가 사업을 과감하게 밀어붙였지만 결코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면밀한 검토 끝에 공원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결심했지만, 마구잡이로 밀어붙이지 않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반대자들을 설복시켰다.

또한 공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날림으로 대충대충 하지 않고 치밀한 계획 아래 튼튼히 해나갔던 것이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