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마음’과 ‘영(靈)’의 경계선을 쉽게 구분 짓기 어렵다. 때론 둘이 뚜렷이 구분되기도 하고, 때론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2분설(dichotomy, 二分說)’, ‘3분설(trichotomy, 三分說)’ 하는 것도 이 구분의 ‘모호성’과 ‘확실성’으로 인해 생겨났다. ‘마음’과 ‘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으면 ‘3분설’이 되고, 둘의 경계를 모호한 채로 두면 ‘2분설’이 된다.

전통 신학에서는 주로 ‘2분설’을 취해왔고, ‘3분설’에 대해선 이단시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근자에 들어선 개혁신학 안에서도 2분설, 3분설을 엄격하게 나누어 반대편을 적대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관용적 태도를 취한다.

‘마음’과‘영’의 경계를 뚜렷이 하지 않는 ‘2분설’의 근거로 많이 드는 예가 아마 ‘영혼이 고양되면 마음도 덩달아 기쁘고, 영혼이 탈진되면 마음도 탈진된다’는 내용일 것이며(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해당되며), 조울증(bipolar disorder, 躁鬱症), 우울증(depressive disorder, 憂鬱症)이 기독교인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신앙고백도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병에 걸리고 심한 경우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엘리야(왕상 19:4)와 요나(욘 4:8) 같은 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심한 우울증으로 심지어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거둬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다. ‘마음’의 우울이 구원받은 성도의 ‘영’까지도 무기력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단 ‘마음과 영’의 관계뿐 아니라 ‘마음과 육체’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이미 검증됐다.

‘잦은 감정 기복’이 갑상선(thyroid gland, 甲狀腺) 이상에서 오고, ‘도덕적 인지(認知)의 손상’이 전두엽(frontal lobe) 손상에서 온다는 것은 이미 정신의학에서 고전에 속한다.

성경도 이미 오래전에 이 둘의 긴밀성을 간파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마음’과 ‘영’을 엄격히 분리하는 ‘3분설’ 역시 나름의 근거가 있다. “너희 온 영(πνευμα)과 혼(ψυχη, 마음, 목숨)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3분설’은 ‘마음’과 ‘영’이 상호 깊이 영향을 주고받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영역 안에서이며, 둘은 각각 고유의 영역을 갖고 상호 불가침 한다고 본다.

예컨대, 아무리 마음의 상태가 최고조로 상승 고양되어도 그 고양된 마음으로 영혼을 거듭나게 할 수 없고, 또 마음의 상태가 최고조로 낙하하여 극단적인 낙담에 빠뜨려지는 경우에도 그것이 거듭난 영혼을 멸망에 빠뜨릴 수 없다 는 말이다.

이와 상반되게 ‘마음’의 메카니즘(mechanism)이 ‘영’의 세계로 침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다. 단순히 ‘마음’과 ‘영’의 상호 긴밀성을 주장하는 ‘2분설’을 뛰어넘어, 거의 둘을 동일시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 뉴에이지언들(new agians)이 그들이다. 그들은 ‘마음의 고양(高揚)’을 통해 ‘영혼의 거듭남’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을 고양하는데 동원되는 종교, 인격 수양, 예술, 문학 등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영매(靈媒)’처럼 된다. ‘3분설’은 바로 이런 사악한 논리를 방어 하는 데 효과적인 논거가 된다. ‘마음, 영’의 영역을 명백히 구분짓고, 둘의 역할과 기능을 전혀 달리 규정하는 ‘3분설’은 ‘마음의 고양’으로 영혼을 거듭나게 한다는 요설(妖說)을 아예 펴지 못하게 한다.

‘3분설’은 ‘구원받으면 반드시 삶이 변화되는가?’같은 질문에도 나름대로의 할 말을 갖는다. 대개 ‘2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마음’은 최고위부에 있는 ‘영혼’에 복속된다고 보기에 ‘영혼’이 구원받으면 그 아래의 ‘마음’은 성화를 이루어 자연히 언행심사의 변화를 이룬다고 가르친다.

이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지지를 받아온 전통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심리학의 발달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짐에 따라, 인간은 단순한 인과(因果) 관계로만 설명될 수 없는 ‘다면성’, ‘다중성’을 가진 매우 복잡 미묘한 존재로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견해들이 승승(乘勝)했다.

분명 거듭나 구원받은 사람임에도 여전히 그의 성향, 도덕성 등에서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지어 신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보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전 5:1, 삼하 11:4).

그런 부정적인 성향들은 선천적인 것과 함께 그들의 성장 과정을 통해 오랜 시간동안 고착화되어 쉽게 변화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회심의 증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게 됨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인간의 윤리, 덕성을 회심의 증표로 본다.)

만일 구원받은 자에게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삶의 변화’가 따른다는 ‘인과(因果) 논리’만을 적용시킨다면, 자신이 기대만큼 변화를 일구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의심하게 되고 심한 경우 절망하여 신앙을 포기하기에 이르게도 한다.

그러나 ‘마음’을 ‘영’과 구별된 독립 영역으로 인정할 때, 둘은 반드시 ‘인과 관계’를 산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극한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 나아가 마음을 케어(care)의 대상으로 삼고, 치유를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용기를 내게 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 정신과의사에게 가서 마음의 문제를 상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마음’과 ‘영’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된 후에는 그런 생각이 많이 불식됐다.

‘위장병’에 걸린 사람은 내과의의 도움을 받고 섭생(攝生)에 주의를 기우리듯이, 신체의 한 부분인 ‘마음’의 연약성을 가진 사람 역시 전문의의 도움을 받고 자기 마음, 감정을 케어 하는 것을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영혼’과 ‘마음’을 분리하는 ‘3분설’은 이렇게 ‘마음’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갖게 했고, ‘마음’을 적극적으로 케어 할 수 있는 논거를 마련해 준다.

중세(中世)에 정신과 마음의 질환들을 무조건‘영’의 영역에 포함시켜 ‘안수’, ‘축사(逐邪)’같은 영적 치유 방법으로만 접근했던 것도 ‘마음’과 ‘영’의 관계를 잘못 설정한데서 비롯됐다.

이즈음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마음 케어(care)’훈련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도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 오늘 기독교 안에 ‘품성(稟性) 훈련’‘분노 다스리기’ 같은 화두가 등장한 것은 그만큼 그것들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런 훈련들이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종교다원적이거나 뉴에이지적으로 흐르는 것을 보면 많이 아쉽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마음’과 ‘영’에 대한 올바른 관계 설정 없이 시급히 ‘마음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실용주의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인이며 복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소홀한 채, ‘마음의 평안’이 지상 목표가 되어버린 결과이다.

그리고 그런 접근을 통해 사람들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볼 때,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 마치 그것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되고, 더 이상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이런 사역에 종사하는 목사들이 왜 복음전파자가 되기보다는 종교다원적인 영성훈련가로 전락되는가 하는데 대한 답변이 되기도 한다.

청중들 역시 ‘인간은 절망적 죄인이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그를 구원 한다’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복음이 갖다 주는 ‘성령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 ‘마음 케어(care)’를 통해 그저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될 때, 그는 필시 종교다원주의자로 전락된다.

어떤 유명한 설교자가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이 임한다’는 제하의 설교를 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무욕(無慾)이 극락을 갖다 준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무위 자연(無爲自然)’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함을 노래한 ‘노자(老子)’, ‘장자(莊子)’에 심취되어 종교다원주의 신앙에 안착한 것은 그가 ‘마음의 고요와 평안’만을 추구하고 복음이 갖다 주는 ‘성령의 평안’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마음 케어(care)’는 ‘뜨거운 감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최고위(最高位)인 ‘영’의 복속물(服屬物)로 삼아 ‘영’에만 치심하고 ‘마음’의 케어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의 체험 없이 ‘마음 평안’만 추구할 때 종교다원주의로 흐르게 된다.

‘마음 케어(care)’는 복음을 통한 성령의 거듭남을 체험한 자들에게 한정 되야 한다 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 ‘마음’과 ‘영’의 올바른 관계 설정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