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의 삶 코스 대표)
신자의 영혼이 삶 중심의 영성, 즉 온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중단 없는 성령의 임재 의식 속에서 살아갈 때, 주님께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곧 성령의 뜻과 인도하심이 나타나는 통로가 된다. '성령의 주되심'은 온전히 헌신된 신자가 순간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삶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성령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충만히 통치하실 때는 분명한 증거가 우리 영혼 속에 나타난다. 그 증거는 바로 우리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에 나타나는데,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 있는 세 구절의 말씀은 그 뚜렷한 증거를 매우 간결하게 표시해 주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16절)는 말씀은 특히 우리의 감성에 나타나는 성령의 주되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감정은 늘 변하기 쉽지만, 우리가 크신 하나님을 순간마다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의 감성은 늘 기쁨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be joyful always in the Lord)'고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17절)는 말씀은 우리의 지성에 나타나는 성령의 주되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말이 있듯이, 쉬지 않는 기도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주님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주님께 쉬지 말고 기도하라(pray without ceasing with the Lord)'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18절)는 말씀은 우리의 의지에 나타나는 성령의 주되심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하는 의지적 결단의 표현이다. 모든 환경이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환경이라고 인정할 때에는 범사에 감사가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라(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to the Lord)'고 그 진정한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쉬지 않는 '삶 중심의 영성'(Life-centered spirituality) 즉 성령의 주되심의 삶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그 내향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 닮기'를 실현시켜나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나날의 삶의 동기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맞추고, 이를 위해서 순간마다 주님의 통치를 의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 성령의 주되심의 외향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의 완수를 위해 능력을 주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께서 함께 거하시는 목표가 바로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권능 있게 증거 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날의 삶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기 원하시는 성령과 동행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속에는 풍성한 복음 전파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에 "인간의 최고 목적은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청교도들의 생각에 있어서 인간 실존의 온전한 목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웬(John Owen)은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도움에 의해서 되어진다; 이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복음의 원리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곧 신약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교제(fellowship, communion)의 의미라고 보면서, 이 교제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의 결과이며, 또한 하나님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피에 의해 준비된 평화의 언약 가운데 동행하면서 가장 거룩하고 신령한 방식으로 주고받는 상호 전달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