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주의 5대 교리 완전정복
칼뱅주의 5대 교리 완전정복

정요석 | 세움북스 | 244쪽 | 13,000원

나올 것이 나왔다. 명시적 기다림은 암시적 소망의 발현일 것이다. ‘칼뱅주의 5대 교리’는 칼뱅주의 신학을 대표한다 할 수 없을지라도, 칼뱅의 신학을 명징하게 드러낸 교리인 것은 분명하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평생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단어는 수천 번은 언급할 것이다(이하, 칼빈은 칼뱅으로). 그런데 ‘칼뱅주의 5대 교리’라는 제목으로 책을 검색하면 불과 몇 권에 불과하고, 그것도 비전문가이거나 절판된 책들이다. 김기호 선교사가 2009년에 출판한 <칼빈주의 5대 교리란 무엇인가?>가 있고, 존 파이퍼의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라는 제목으로 2014년 두란노에서 번역 출간된 책이 있다. 하지만 존 파이퍼의 책은 품절된 상태다.

2006년 개혁주의 신행협위에서 출간된 김봉환의 <칼빈주의 5대 교리>가 그나마 가정 근접한 책이다. 1999년 성광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된 에드윈 H. 필마(Edwin Palmer)도 이미 오래 전 절판된 상태이다.

이러한 출판 결과물들은 ‘칼뱅주의 5대 교리’가 갖는 무게와 관심에 비하면 형편없이 미미하다. 많은 관심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거의 읽혀지지 않거나 비전문가에 의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정요석 목사와 세움북스가 ‘칼뱅주의 5대 교리’로 만났다는 소식에, 그동안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번에 출간된 정요석의 ‘칼뱅주의 5대 교리’에 대한 저술은 이전의 책들과는 사뭇 접근 방법이 다르다. 이전의 책들이 과도한 교리적 이해에 함몰되거나 적용에 지나치게 몰입했다면, 정요석은 역사적 근거와 상황 속에서 접근한다.

정요석의 저술은 이전의 저술방법과는 미묘한 차이를 가진다. 영국 애버딘 대학에서 토지경제로 석사를 마치고, 백석대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덕분인지, 사회·역사적 이해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세움교회 목사로서 실용적이며 목회적인 저술 방식 또한 독자들에게 감흥을 준다.

이 책은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과정 속에서 ‘칼뱅주의 5대 교리’가 나왔는가를 설명하고, 되어가는 과정과 결과, 목회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준다.

지금까지의 책들은 대체로 항론파, 즉 알미니안을 따르는 이들의 주장은 극히 제한적이고 축소된 상태에서 소개됐다. 도르트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만을 집중해 다루었다. 비록 저술 목적이 그렇다 해도 항론파의 주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고 그것을 강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불분명했다.

이 책은 항론파의 주장이 갖는 미묘하고 교묘한 주장을, 명확하게 표를 통해 도르트 신조와 비교한다. 독자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 또한 함께 제시한다. 필자는 정요석의 주장을 따라가며 중요한 몇 가지만 정리해 보자.

‘칼뱅주의 5대 교리’, 즉 도르트 신조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

가장 먼저 도르트 신조가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도르트 신조는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이 칼뱅의 예정론에 반하여 주장한 것들에 대해, 화란과 유럽 8개국의 개혁주의 대표들이 1618년부터 1619년, 약 6개월에 거쳐 회의하여 작성한 칼뱅주의적 교리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의 회의를 통해 만들어진 교리이다. 거의 7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백 명의 체류 비용을 네덜란드 의회가 지불하고서라도, 회의를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는 피 흘려 구축한 종교개혁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화란의 종교개혁은 독립운동과 함께 일어났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교회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적인 문제들도 염두에 두고 상황을 살펴야 한다. 네덜란드는 국가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아르미니우스파의 주장을 국가적 위기로 인식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네덜란드가 가톨릭에서 루터주의로, 루터주의에서 다시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함으로 완전히 칼뱅주의 신학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가톨릭을 신봉한 스페인은 화란에 가혹한 탄압을 시도했다. 네덜란드 국민들은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과 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많은 대가를 통해 독립과 종교개혁을 이룩한 이들에게, 아르미니우스파의 주장은 심각한 종교적 퇴보와 진리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는 것으로 비췄다. 도르트신조를 대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르미니우스는 제네바와 바젤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 후 다시 칼뱅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에게 신학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1578년 화란으로 귀국해 1588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코른헤르트라는 극작가가 칼뱅의 신학을 전승한 베자의 예정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만약 하나님이 어떤 자를 선택하고 어떤 자를 버리게 된다면 버린 자들은 죄를 짓게 되니, 결국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는 죄의 조성자가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당돌하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 칼뱅주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베자는 아르미니우스 목사에게 이것을 조사하고 반론할 것을 부탁한다. 코른헤르트의 주장을 살펴보는 가운데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생각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함께 동조하게 된다.

1603년 9월 이후 그는 레이던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면서, 칼뱅주의 예정론을 버리고 코른헤르트의 주장과 흡사한 이론을 교수하기에 이른다. 이에 칼뱅주의 교리를 따르는 이들에게 당혹감을 주었고, 결국 남부 화란 교회의 대표자들이 레이던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 신학에 대한 질의를 하게 된다.

아르미니우스는 1609년 10월 19일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지만,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어 화란 교회는 이것을 의회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다루게 된다. 이것이 바로 6개월 반 동안 180회에 걸쳐 논의한 도르트 총회이다.

종교개혁 개혁신학
▲제네바 빠스띠옹 공원에 세워진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비.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 ⓒpixabay.com
칼뱅주의 5대 교리는 왜 중요한가?

이제 칼뱅주의 5대 교리의 중요성을 살펴보자. 칼뱅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예정이 중심이지만, 논쟁의 핵심은 신론이 아닌 인간론이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있는가에 대한 논쟁인 셈이다.

루터와 칼뱅은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가 하나님의 예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보았다.

그 근거는 에서와 야곱의 선택에 있어,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한 것에 있다. 그들이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에서는 유기하고 야곱은 예정하신 것이다.

코른헤르트와 아르미니우스는 이러한 칼뱅의 예정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유기는 에서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이끄는 악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기원자가 되는 셈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칼뱅의 예정론은 선택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악을 짓게 하고, 선택 받은 이들은 그릇된 평안에 빠져 도리어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에는 문제가 없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적 상황과 유아세례 논쟁을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는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하고 여러 이유로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비록 신자의 몸을 통해 태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지성의 능력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아이들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뱅주의를 받기 전, 네덜란드는 유아세례를 거부한 재세례파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다. 재세례파는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이러한 신학적 모호함에 사로잡힌 화란인들에게 어린아이의 죽음은 매우 심각한 갈등과 고민을 던졌다. 아르미니우스파는 재세례파와 비슷한 맥락 속에서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결론을 낳는다.

그러나 성경은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의 태에 있을 이미 예정된 이는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칼뱅의 예정론은 어린 아이에 죽은 아이들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갖게 했던 것이다.

또한 만약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가 된다면, 구원은 인간에게 주도권이 넘어감으로 하나님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만다. 아르미니안파의 주장에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위험한 독을 지닌 교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바라보는가?


도르트 신조를 칼뱅주의 5대 교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교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중요한 부분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교리는 성경신학에 근거하며, 성경신학은 다시 교리를 통해 재해석되는 순환론적 관계이다. 저자는 아르미니우스파(이하 항론파)의 주장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도르트 신조의 반박을 다시 비교 제시한다.

항론파 주장의 핵심은 ‘전적 타락’에 대한 부정이다. 모든 교리와 주장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전적 타락이란 인간은 더 이상 자력으로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전적’은 ‘일부’ 타락을 주장하는 항론파에 대한 반증으로, 모든 부분에서 타락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의 처음 상태는 지정의 모두에서 거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짓는 순간 제3장 제1항이 말하는 것처럼 지정의 모두가 부패했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지식으로 갖추어진 지성이 원죄로 말미암아 무지, 끔찍한 어두움, 허무, 판단의 왜곡으로 점령되었다고 아래처럼 말합니다.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져,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입니다. 악을 행하는 지각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지각은 없습니다(41쪽).”

인간은 전적(TOTAL)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과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어느 한 부분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이끄시지 않으면 진리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신학적 요소를 명징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목회자의 심정으로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실제로 예정론은 논쟁의 여지가 많으며,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성경은 예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시키고 있다.

목회자로서 다른 목회자들에게 제안한다면, 이 책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예정은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사랑과 은혜가 오묘하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이 가진 실존적 질문에 로봇처럼 화석화된 답이 아니라 함께 토론하고 고민을 나눔으로 삶의 본질에 더 충실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담임목사